우리의 주된 싸움의 원인은 외부에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뭔가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요구와 역할 때문에. 지금까지 나에게 분쟁이나 싸움은 당사자간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문제가 있어도 둘이서 해결하면 될 일이었고, 해결이 되지 않으면 관계를 정리하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결혼은 그렇지가 않았다. 라이트급 선수가 헤비급 선수를 상대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지금까지는 갈등 상황에서 나의 입장과 내 생각을 밝히고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얘기도 들어보면 대부분은 오해가 풀리거나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데 시댁과의 갈등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같은 국적의 같은 문화권 사람인데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차라리 국제결혼이었다면 갈등이 덜 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벽’이 느껴진다는 말을 처음 실감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상사와 말이 안 통하거나 제멋대로인 후배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시댁과의 문화 차이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내키지 않는 경우에도 주어진 역할대로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처음에는 시댁과 관련된 일로 싸울 때에도 그저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사이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 치열하게,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다퉜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는 나와 대화가 통했고, 남편의 어머니는 그 아들과 얘기가 통했다. 하지만 그 관계가 크로스가 되면 그게 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기보다는 엄마의 말을 아들이 잘 따르는 사이였다. 크게 엄마의 말을 거스를 이유도 없었고, 가끔 다른 의견을 내더라도 엄마에게 설득당하거나 싫은 소리가 오가는 게 싫었던 남편은 어지간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엄마의 말을 따르는 편을 선택했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내 의견을 말하고 내가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는 나의 성격과 굳이 분쟁을 만들거나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원만하게 넘어가기를 바라는 남편. 연애할 때는 크게 다툴 일이 없었기에 그런 줄 몰랐고 결혼하고 나서야 이런 상황을 겪게 되자, 자상하고 합리적으로 느껴졌던 남편의 성격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비겁해 보이기까지 했다. 단지 갈등이 싫어 이렇게 하다니.
사실 한 두 번, 내 의견을 접고 들어가는 건 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결국 그렇게 굳어질까 봐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나하나 따지고 계산하고 지지 않으려 했던 마음. 내가 맞고, 합의점을 찾고 싶은 마음. 지금은 그럴 에너지도 없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말에 따르지 않으면 될 일인데 그대로 하기는 싫으면서 욕을 먹을까 봐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며느라기’라 부르는 그 시절이랄까. 신입 시절 열정 넘치던, 무엇이든 배우고 잘하고 싶고,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그렇게 우리의 신혼은 처음 맞이한 명절 이후 때때마다 돌아오는 명절과 제사, 각종 행사 때마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실감하며 다툼과 갈등이 앞뒤로 한 번은 꼭 들어가는 패턴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명절증후군의 뜻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아 아직까지도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행사 즈음이 되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두통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치 가면을 쓰고 연극하듯 각자의 역할을 내키지 않아도 해내려 했다. 솔직히는 해치웠다. 역할 놀이하듯 시간을 보내고 오면 다툼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만이 남았다. 이제는 다툼의 원인이 그걸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다툼과 갈등에 꼭 답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만 해도 화해는 곧 답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있지도 않는 답을 찾으려 끝도 없는 말싸움을 했고, 앞으로 닥칠 반복적인 상황에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굳이 받아내려고 했었다. 내가 똑같은 상황에 지치지도 않고 반복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듯, 그 사람 또한 똑같을 텐데. 그 외의 다른 주변인들도.
화해는 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이해하고, 넘어가 주는 것. 그걸 알기까지 강산이 한 번 변할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그건 무조건 시간이 흐른다고, 덮어놓고 이해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 사람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아지고 측은지심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화해가 되는 것 같다. 일일이 따지고 짚고 넘어가지 않아도 되는 마음. 이과생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정확히 따지고 계산하고 싶었는지. 이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조금 창피한 마음까지 더해지면 더욱 좋다. 자연스럽게 화해가 된다. ‘화해를 한다’라는 언급도 굳이 필요 없을 만큼, 죽을 것 같던 숙취가 어느덧 사라지듯, 서운함도 죽어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조금씩 옅어진다. 그리고 굳이 좋지 않은 기억을 내 안에 두고 싶지 않아 진다. 흘려보내게 된다. 내가 찾은 화해의 방법은 그런 것들을 흘려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