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보다, 싸움의 기술!
싸움의 기술. 어쩌면 싸움판에서보다 일상에서, 그중에서도 더 효용이 높아지는 건 연애와 결혼생활 중에서라고 할 수 있겠다. 고백의 기술, 사랑의 기술이 아니라 싸움의 기술이라니. 평화주의자라 쓰고 실상은 가벼운 싫은 소리조차 잘 못하는 매우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살아가면서 참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차라리 눈감아버리고 못 느끼는 척하고 싶을 만큼 갈등이 싫은 것은 사실 싸운 후 그것이 깨끗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에 앙금이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대화하고 지낸다는 것이 가식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갈등 혹은 상대방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와 그것이 표출된 상태가 되겠지.
그렇지만 작은 갈등과 불만이 내 안에서만 이리저리 튕겨 다니는 것과 그것이 굳이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를 툭툭 치고 다니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그리고 사실 갈등과 불만의 요소가 문제인 점은, 그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아주 논리 정연하게 문제제기를 한다 해도 바뀔 가능성이 낮은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참고 참다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또 다른 불만이 생길 수 있고,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조차 안(못) 한 상대방은 갑자기 문제점을 갖게 된 사람으로 지적당한 것에 당황스럽고 그럼 지금껏 자기를 그렇게 불만스럽게 여겨왔던 것인가 하며 속으로 뜨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이나 갈등을 피하려는 이유가 그것이 없던 일이 될 만큼의 해결이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괜히 서로 마음만 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조차 일차원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성격이나 어떤 환경이 온오프 버튼을 누르듯 단번에 바뀔 수 없는 것이고 하나하나의 작용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것인데 그 과정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만스럽지만 애써 발전 없는 관계를 유지하려는 미련함이라니.
연애보다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그러면서 나의 싸움 인생에 대해 전반적으로 뒤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역시나 나는 어지간하면 참거나 드러내지 않는 쪽이었고 싸우고 나면 화해하기 전까지의 어색함과 싸우면서 듣고 보았던 잔상들이 남아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오래 걸렸고 마음 한 편 서운함이 남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도.
최대한 갈등을 피하고 싶은 성향이기도 하고, 특히나 결혼 후에 생기는 불만은 친구끼리의 다툼과는 차원이 다른 범위로 영향이 미칠 것 같아 더더욱 피하고자 했다. 연애 때는 사실 크게 싸울 일이 별로 없었다. 술을 마시는 날 너무 늦은 귀가시간이 다툼의 주된 원인이었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자리는 여러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니 내 기준에서는 필요하다 싶어 싫은 소리를 했지만 그 시절의 사회초년생에겐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날 권리 따위도 없었고 특히나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러는 건 뭔가 모양 빠지는 일인지 다정한 남자 친구도 그 일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었다. 그 주제는 신혼 초까지 이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제는 걱정보다는 내 마음의 평화에 더 집중하기로 하고, 어차피 말해도 듣지 않고 바뀌지 않는다면 간단한 생존 확인 정도만 하는 걸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그 문제는 이제 문제 자체가 될 수 없어져버렸다. 남편의 체력도 떨어지고, 다들 바쁜 탓에 그렇게 늦게까지 술을 마실 친구들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공부에도 때가 있다지만 술 마시고 노는 것에도 다 때가 있나 보다.
둘의 갈등은 이 정도로 자연스레 소멸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결혼을 하면 부록처럼 따라오는 제사와 명절, 가족모임이 문제가 되었다. 결혼에 대해 부부 둘만의 삶만 생각하고 상상했던 터라 그 부분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불행은 뒤통수를 치며 온다더니 역시-
굳이 명절과 제사를 꼽지 않더라도 무언가 이상 기운은 오래지 않아 감지되었다. 신혼 초, 거의 주말마다 양가를 번갈아가며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밥 먹으러 오라 반찬 가지러 오라는 부름에 자연스레 양가에 갔었다. 사실 맞벌이하느라 요리를 할 시간도 없었고 결혼 전에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회사에 다녔기에 그게 버거워서 부름에 응하는 게 편하기도 했다. 우리 둘 다 결혼 전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부모님들도 허전함을 그렇게 달래셨던 것 같다. 주말이면 밀린 잠을 자기 바빴고 부모님 댁에 가서도 쉬고만 싶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불편한 점들이 눈에 띄었다. 모든 사람과 가정의 분위기가 다르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랬다. 남편은 시댁에 가서도 자기 방에서 누워있거나 쉬고, 처갓집에 가서도 주인보다는 객에 가깝게 행동했다. 내가 생각하는 주인은, 손님이 집에 오면 손님을 대접하는 입장.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시댁에 가면 분위기로는 분명 ‘객’이었는데 안주인인 어머님의 보조역할로서 주인에 가깝게 행동했다. 남편은 분명 시댁에서 자신의 집이니 ‘주인’에 가까웠으나, 대접받는 손님처럼 움직임이 얼마 없었다. 엄마에겐 미안했지만, 친정에 가면 나는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내 몸이 힘들어서 쉬고 싶은 마음과 엄마에게 응석 부리며 예전처럼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엄마 집에서는 나도 이러고 있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이렇게 살았었다고, 나도 우리 집에선 너랑 똑같다고. 하지만 이런 건 의미가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서는. 우리는 서로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위해주려 하지만 우리가 다투는 이유는 주로 외부의 이유들 때문이었으니까. 며느라기의 사린이와 구영이가 시댁에 가기 전, 어떻게 행동할지 둘이서 합의 하에 가도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 어른들에 의해 결국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답시고 노동의 몰아주기를 지속하는 것처럼.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매우 치열하게 다투고 답을 내려고 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