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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닥의 생각 Feb 13. 2021

의미 없는 말들, 죽은 언어에 대하여

살아갈 이유, 살아낼 힘이 되는 한마디

다섯 살 딸아이 나라는 하루에도 십수 번 나에게 다가와 "아빠 사랑해"라고 말한다. 하루 한두 번이면 감동의 포인트 라도 되겠지만 나라의 사랑 고백은 쉴 틈이 없다.

주말 아침 일어나 눈을 맞추면서 시작한 사랑 타령은 양치하면서 한번, 물 마시면서 한번, 심지어는 TV를 보다가 멈춤 버튼을 누르고도 사랑한다고 한다. 엄마한테 혼나고 시무룩해 있을 때도 나에게 다가와 사랑한다고 하고, 화장실에서 큰일을 치르고 뒤처리해달라고 부를 때도 사랑한다고 한다.

나라의 사랑 고백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나와 가족을 향해 사랑한다고 통보할 뿐이지, "아빠는 나를 사랑해?"라며 되묻거나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어느 날은 내가 먼저 "나라야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알아, 그런데 내가 아빠를 더 사랑해"라며 되받아 친다. 그 때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순수한 진심으로 가족들에게 더 큰 사랑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이 아이에게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사랑하는지, 또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와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 나라는 자신의 모든 감정과 존재의 실존을 정직하게 내뱉을 뿐이고, 그 언어가 '사랑해'일뿐이다.

다섯 살 나라의 사랑한다는 한마디, 이 날 것 같이 살아있는 원초적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 살아갈 이유이자 살아낼 힘이 된다.

나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꾸미지 않고, 포장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살아있는 언어를 말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언어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감정을 속이고, 문장을 꾸미고, 할 말은 못 한다. 그냥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이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돌리고 돌려 지껄일 뿐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죽은 언어들과 의미 없는 말들의 향연 같다. 이 말들의 진심이 없는 말, 감정이 배제된 말, 말을 위한 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 자랑하기 위한 말 등등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죽은 언어들은 관계와 사회를 넘어 정치와 종교 까지 마치 우리의 모든 공기를 뒤 덮고 있는 것만 같다.  

선거철마다 유세차에 탄 정치인들이 확성기에 대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여러분"이라고 외쳐 되지만 과연 어떤 국민이 그 정치인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느낄까?

주말마다 이어지는 각 종교의 예배의식에서 목사님은 직장에서의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고, 스님은 갈등으로 뒤덮인 가정의 문제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라고 하지만 직장 생활 한번 해본적 없이 신학대 나와 설교하는 사회생활 무경험자의 충고와 가정을 꾸리기는커녕 연애조차 해본적 없는 이의 가르침은 과연 문제해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직장에서 회의할 때 창의적 아이디어와 전략적 사고로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해 보자라고 말은 하는데 대체 뭐가 창의적이고 전략적 이란 것인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단어를 배설할 뿐, 그 의미를 실현하려 하지 않는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료를 마치고 절실하게 앉은 환자에게 의사는 만병통치적 처방을 내린다.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규칙적 식사와 충분한 수면을 지켜주세요. 그리고 술 담배는 멀리하시고 적당한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표정한 표정의 뻔한 처방에서부터 스트레스는 올라온다.

죽은 언어의 향연은 온라인 세계에서 더 악취를 풍귄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치장한 '인스타그램'이나, 인류애를 품은 것만 같은 같은 '페이스북', 정의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것 같은 '트위터'나, 이모티콘 하나로 단톡방에 내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카카오톡'까지  일상 속에서 내가 내뱉고 지껄인 말과 끄적인 글들 중에 과연 나의 허세와 위선, 질투와 거짓을 넘어 감정의 정직함으로 실존의 언어를 말한 적이 과연 있기나 할지 의문이다.

우리는 늘상 의미 없는 말들, 죽은 언어를 주고받는다. 충분한 예의와 격식을 갖추더라도 이 언어들은 피차의 삶을 좀먹고 피폐하게 할 뿐이다. 하루, 단 한 명 에게라도 한마디의 의미 있는 말, 살아있는 언어로 대화 할 수 없을까? 만나는 사람과 말 수는 줄어들더라도 오히려 그런 한 마디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지는 않을까?

요즘은 의식적으로 "언제 밥이나 한번 먹어요"는 의례적 인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말속에는 관계는 유지해야 하는데 따로 만나기는 어색하고, 시간과 돈을 들이기도 싫고, 또 당장 만날 일정을 잡기에는 귀찮은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 있다.  예의를 갖춘 이 무례한 인사를 남기기보다는 그냥 날짜를 잡거나,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시간을 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것이 그나마 누군가를 위한 최선의 진심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주말 출근을 위해 엄마에게 나라를 맡겼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어김없이 들려오는 나라의 "아빠 사랑해"라는 말과, 마흔 다 된 아들에게 "차 조심하고 일찍 일찍 다녀라"라는 엄마의 말 한마디가 두 귀를 넘어 마음에 박혔다. 투박하지만 살아있는 그 말들에서 나는 또 살아갈 힘을 얻었다.


생일날 나라에게 받은 "아빠 사랑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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