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바라나시에서의 일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에서 있었던 15년 전의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머리까지 올라오는 18Kg의 배낭에 론리플래닛 한 권을 들고 관광객이 없던 곳을 찾아다니던 장기 여행자에게 갠지스를 품은 바라나시만큼 매혹적인 곳은 없었다.
바라나시의 골목길은 말 그대로 미로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크기의 골목이지만 소들이 그 길마저 막고 꾸벅꾸벅 졸고 있기 일쑤였다. 녀석들의 궁둥이를 때려가며 동네 마실 다닐 정도가 돼야 바라나시 좀 다녀봤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정도 바라나시에 머물렀다.
내가 머문 숙소는 갠지스에서 가장 큰 화장터 마니카르니카 가트 앞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였다. 창문만 열면 화장터의 불길이 보였고, 장작 타는 냄새와 연기가 하루 종일 방안으로 가득히 밀려 들어왔다. 그와 함께 수시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그것은 고인을 어깨에 둘러멘 유가족들이 화장터로 가며 외치는 소리이다. 꼭 우리네 옛 상갓집 곡소리 같은 그 소리는 ‘라마신은 알고 계신다’라는 뜻이었다.
갠지스에서의 화장은 모든 인도인들의 꿈이다. 윤회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의 문과도 같아야 할 그곳의 실상은 지옥의 끝인 것만 같았다. 화장터 입구에는 자신을 화장시킬 장작을 사기 위해 구걸하는 노인, 장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빌어먹는 것부터 배운 아기, 외팔로라도 장작을 날라 한 끼 먹을 돈을 버는 남자까지 문명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 눈앞에서 매일 펼쳐진다.
바라나시 거지가족 : 내가 좋아하던 라씨집 길가에 자리잡았던 이들을 난 매일 마주쳐야 했다.
나는 무슨 감상에서인지 아니면 ‘카르마’에서인지 하루 한 끼의 식사 비용을 아껴 그 돈으로 제법 양이 되는 쌀 한 봉지를 샀다. 구걸하는 이들에게 한 줌씩이라도 나눠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길가의 어린 아이에게 한 줌을 내밀자마자 나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주위의 모든 거지들이 나를 향해 달려와 쌀 봉지를 손으로 뜯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땅에 떨어진 쌀들을 진흙과 함께 주워갔다. 나의 선의가 이들의 아귀다툼을 만든 것이다. 뭐랄까 연민보다는 두려움이, 동정보다는 당혹감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화장터 계단에 앉아 “왜 저럴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놀라운 경험은 그 뒤에 이루어졌다. 내가 가져간 쌀을 아귀다툼에 끝에 집어간 거지들 중 아기를 안은 엄마가 계단 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치마폭에서 아까 진흙과 재로 범벅이 된 쌀들을 꺼내 갠지스 강물에 씻어 녹슨 깡통에 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였다. 우리는 절로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 짧은 눈인사에서 나는 뭔가의 뇌관이‘뚝’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추억을 위해 낭만에 취한 작은 선의로 쌀봉지를 들었던 알량함이 부끄러워졌다. 그들의 삶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삶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은 생색내기가 아니라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바라나시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죽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역설적인 삶, 가장 성스러운 곳에서 세속적일 수밖에 없는 장사꾼들의 치열함, 영혼의 정결을 위해 오물이 떠다니는 흙탕물 속에 몸을 담그는 순례자들의 간절함, 그리고 문제도 모르면서 답을 찾겠다고 찾아온 여행자들의 어쭙잖음까지 바라나시는 이 모든 역설과 혼돈 그 자체의 도시로 살아 있었다.
여행도 끝났고 학업도 끝났다. 그리고 여의도 직장인이 된 지 10년이 된 요즘 이곳 여의도에서 그때 그 바라나시의 감정이 다시 느껴진다.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지루함이자 탈출하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정장에 사원증을 걸고 백팩을 맨 채 갈길 바삐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지만 그 머리와 마음에는 또 어떤 기대와 희망, 그리고 고민과 갈등이 채워져 있는지 알지 못하는 곳이다.
나는 바라나시 골목을 돌아다니던 마음으로 여의도 빌딩 속 사람들의 마음속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일상 속 누군가의 이야기들은 또 다른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일로 만났지만 인연이 된 만남도, 학연과 지연으로 만났지만 남이 된 만남도 많았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형식을 지나 재미를 넘어 의미가 되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며, 원치 않는 상처 역시 수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야 여의도를 제대로 보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또 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얄팍한 호기심이나 어쭙잖은 선의로 누군가를 대하는 것은 피차의 삶에 피로도만을 더 높일 뿐이다. 여기는 만남을 통해 그냥 일이 잘 되는 것이 더 좋은 곳이다. 선의보다는 신뢰가, 호의보다는 실력이 우선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의 삶이었다.
동정과 연민을 버리자 바라나시가 있는 그대로 보였던 것처럼, 호의와 기대를 버리자 여의도가 있는 그대로 보였다. 역설과 혼돈이 바라나시의 본모습이듯 냉정과 이성이 여의도의 본모습이다. 그 냉정함을 탓할 것도 없고 인위적 따뜻함을 찾을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함께하면 된다.
여의도에서의 인위적 만남과 작위적 관계에 지칠 때 나는 15년 전의 바라나시가 생각난다.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완전히 다른 풍경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나는 바라나시 여의도에서 늘 여행과도 같은 만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