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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닥의 생각 Apr 05. 2021

출퇴근 블루

직장인의 출퇴근 우울증 극복기


'코로나 블루'로 모두가 힘들었을 지난해, 나에게는 출퇴근 블루라는 오래된 힘듦이 더해진 이중고의 한 해였다. 


서울의 끝에서 반대편 끝인 여의도로 출퇴근 한지 10년, 하지만 아직도 그 먼 길의 지루함과 막히는 길의 짜증, 그리고 미어터지는 대중교통의 고통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집 문을 닫고 사무실 문을 열기까지 대중교통으로 1시간 40분, 운전을 해도 그만큼이 걸린다. 두 번의 버스와 23개의 전철역, 아니면 북부간선도로와 내부순환로 그리고 강변북로까지 이어지는 29Km의 차 막힘 역시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차로 출퇴근 하는 거리 / 오늘도 이 길을 왔다

하루 3시간, 한 달 60시간, 일 년 중 30일을 나는 이 막히는 길이나 터질 것 같은 대중교통에서 속에서 살아내고 있다. 책, 넷플릭스, 웹툰, 라디오, 게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봤지만 고통과 지루함은 변함없다. 우울증이 무엇인지, 공황장애가 무엇인지를 나는 매일 이 길에서 경험하고 산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직장을 옮기거나 집을 이사하면 된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취업난과 괴물 같은 부동산 패닉 시대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의도 직장인으로 도시빈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나는 부동산 난민이자 교통 빈민은 되는 듯하다. 


현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봤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 새벽 출근도 해보았지만 체력의 한계가 있었고, 막히는 퇴근길을 피하기 위해 도서관에 들러 자기 계발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집에서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딸아이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효과가 있던 일은 스쿠터 한 대를 산 일이다. 망우로에서 시작해 청량리, 종로, 신촌을 거쳐 서강대교를 넘어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출근길 동대문 시장 노점에서 먹는 햄치즈 토스트와 믹스커피 한 잔, 그리고 퇴근길 경동시장에 들러 사가는 과일 한 봉지는 출퇴근의 고통을 해소하고 때론 여행과 같은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완벽한 방법은 되지 못했다. 한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장마, 그리고 봄날의 미세먼지를 피하면 스쿠터로 출퇴근할 수 있는 날은 일 년의 고작 3분의 1 정도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안전운전을 한다고 해도 사고의 위협은 늘 도사리고 있었다.




2020년의 마지막을 며칠 앞두고 나의 출퇴근 블루는 더 깊어졌다. 코로나로 그나마의 여가조차 누릴 수 없었던 스트레스가 더해진 듯했다. 뭔가의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휴일 아침, 출근 시간에 또 눈이 떠졌다. 억울한 기상 후 밀려오는 짜증 가운데 올해가 가기 전 이 출퇴근 블루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무엇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타고 회사로 출발했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물 한 병을 챙겨 집까지 걸어오기. 매일 막히는 차창 밖을 보며 “걸어가도 벌써 갔겠다” 하던 푸념을 실제로 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뜬금없이 강변길을 따라 걷는 35Km, 7시간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걷기 시작 한지 4Km 지점 / 여기 까지만 해도 좋을때 였다

5Km까지는 괜찮았다. 처음 걸어보는 길에 대한 설렘과 사람 없는 산책로에서 잠시 벗은 마스크 사이로 들어오는 한겨울의 찬 바람도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10Km가 넘어가자 조금씩 땀이 식어 한기가 밀려왔고, 15Km가 지나면서는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0Km 지점에서는 발바닥에 물집이 느껴졌고, 25Km 즈음에는 콜택시 어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걷기 시작한 지 5시간이 넘어가자 뭐 하는 짓인지,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먼 길을 매일 출퇴근하는지, 오만가지 마음이 다 밀려왔다. 6시간이 넘어가자 막히는 도로라도 편하게 앉아 음악을 듣고, 지하철에서 따뜻하게 유튜브라도 보던 것이 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30Km를 지나 마지막 5Km를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지금까지 걸어온 게 억울해서였던 것 같다. 




마침내 집이 보였다. 매일 막힌다, 멀다, 힘들다 하며 도착한 집을 7시간 동안 걸어 도착하니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애초에 무슨 의미를 품고 시작한 걸음은 아니었지만 한 편의 뿌듯함과 그 이상의 허무함이, 그리고 뭔가의 서글픔과 연민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전화가 왔다. 대파 한 단 사 오라는 아내의 목소리와 과자 들어간 요거트도 같이 사 오라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더 이상 걸을 수도 없던 발길을 돌려 마트로 갔다. 대파 한 단과 요거트 한 줄을 사는데 왜 그리 울컥하는지 내 맘을 내가 알지 못했다.


봉다리를 들고 집 초인종을 눌렀다. 어디 갔다 이제 왔냐고 핀잔하는 아내와 요거트부터 찾아 꺼내 드는 딸아이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때야 알았다. 내 출근과 퇴근의 의미를, 나는 한 시간이 걸리든 일곱 시간이 걸리든 이들을 위해 또 내일 집을 나서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마냥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길이 아닌 것을, 내가 짊어지어야 할 가장 무겁지만 기쁜 짐이란 것에 감사할 수 있었다.


해가 바뀌고 또 출근을 한다. 여전히 힘겹지만 그 길이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걷는 것보다 낫고, 또 봉다리 한가득 무엇인가의 채워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의 힘듦과 가족의 평안이 등가의 가치를 지닌다면 난 더 기꺼이 더 힘겹기를 자처하겠다. 그렇게 나의 출퇴근 블루는 10년 만에 일단락을 지었다. 

그 날 걸은 길


* 2021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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