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하(立夏)호, 첫째 주
단편 소설 - 이타적인 이기주의자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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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너네 집 앞 도착했어. 잠깐 나올래?
제출 기한이 한참 넉넉한 과제를 하고 있었다. 저녁은 이미 먹었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많이 신난 듯한 목소리를 한 연주의 전화다.
사실 며칠 전에 성재랑 완전 싸웠거든. 이번에는 진짜 심각해. 아니 얘가 안 그러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모르겠어. 자기 할 말만 하면 끝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부연 설명 없이 전하는 것을 보니 술을 마신 상태인 게 확실하다. 휴대폰을 볼과 어깨에 끼워두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누가 감정 조절 못한 거야.
내가 그거 말해주러 왔지. 너 맨날 담배 피우는 데로 와.
싸웠다는 말을 처음 듣는 게 아니라 할 수 있었던 말이다. 이 둘은 주로 누구의 잘못에 의해 다툼이 일어난다기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조절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버스 막차 끊겼을 텐데 어떻게 왔어.
연주는 우리 집 화단 옆에 쪼그려 앉아 까스활명수를 마시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꼭 작은 토끼 인형 같았다.
카택 불렀지.
나 집에 없으면 어쩌려고?
너 맨날 학교 끝나고 집에 있는 거 다 알지 내가.
연주는 버스가 끊기면 택시를 잡아서라도 왔다. 볼 일이 끝나면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그동안 연주의 충동적인 행동을 아무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와서 특별히 함께 하는 건 없지만 잊히지 않았다는 것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도 오늘은 그러지 말지. 내 속에서 나는 연주에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 항상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딱히 누가 잘못한 건 아니었네. 네가 다른 사람한테막 대하지는 않잖아. 근데 성재가 남자친구이기도 하고 워낙에 네 말 잘 들어주는 걸 너도 아니까. 그래서 너는 해소하고 싶은 욕구가 자꾸 커지는 거고. 이번에는 걔도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자기는 네 입맛 따라서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는 사람 아니라고. 왜 네 얘기만 하고 나는 안 물어봐 주냐고 막 소리 지르더라.
하마터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얘기할 뻔했다. 연주는 화가 나는 일, 속상하고 슬픈 일에 무조건 공감해 주길 원하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일방적으로 자기감정에 대해서만 털어놓았을 거고, 성재는 그 상황에 지친 것이었다.
그동안 뭔가 쌓인 게 있었나 보다. 그럼 처음부터 말을 해주지. 갑자기 그렇게 말을 해버리면 너도 당황스럽잖아.
아 내 말이. 말하라고 해서 말했더니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잖아.
말해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전에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겠지. 성재도 나처럼 질문받길 원하고 있었을 거다.
너는 내 입장, 걔 입장도 다 이해해 주는데. 이번에는 성재가 속 좁게 굴었어. 다음 주에도 지혜가 만나자고 한다, 분명 만나면 술 마실 텐데 다이어트 때문에 고민이다, 결국 만나기로 했는데 어떡하냐, 과제니 발표니 피곤해 죽겠는데, 망했다. 배고픈데 엽떡 먹을까 말까. 뭐 이런 맨날 하는 얘기들 했어.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되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까….
성재는 ‘그렇구나’ 를 이용하여 오랜 시간 참았을 것이다. 피곤해, 배고파, 짜증나, 힘들어. 일방적인 전달.그게 습관이 된다면 상대방은 결국 할 말을 잃는다.
지혜든 성재든 다들 대화가 안 통하는 것 같아. 네가짱이야. 내 말에 공감도 해주고 이해도 해주고. 너 없었다고 생각하니까 암담하다.
연주는 엉덩이를 몇 번 털더니 화단에서 일어났다. 택시를 부르려고 하길래 먼저 내 휴대폰을 흔들며 보여줬다.
아냐.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택시 왔다 연주야. 조심히 가. 잘 들어갔는지 카톡 하나 보내주고.
잔걸음으로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창문을 두고서로 한참 손을 흔들었다. 말실수한 건 없었겠지. 커플싸운 얘기는 듣는 게 아닌데. 자갈돌을 툭툭 차며 돌아갔다. 연주는 다들 대화가 안 통한다면서 애인도 있고 친구도 많다. 하다 만 과제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연락이 왜 없을까. 씻고 있으려나. 하며 인스타그램을 켰다. 아무래도 중독인 것 같다. 연주의 프로필이 붉은 띠를 두르고 빛났다. ‘우리도 드디어 하루 필름 찍었다!’, ‘@jihye_1123’. 인화 사진을 찍어 게시글을 올린 지 15분이 지나있었다. 집에 잘 들어갔구나. 우리의 채팅방은 여전히 4일 전에 멈춰있었다.
나는 꼭 우물 같다. 누구나 물을 마시던지, 퍼 담던지 원하는 게 해결되면 간다. 그리고 늘 그 자리에 있는 우물을 찾아온다. 가끔은 우물 위 국자가 찰랑거리다 떨어지는 날도 있다. 한동안 누구도 오지 않은 것이다. 아직 갈증 날 때가 아닌가 보다 싶다가도 문득 깨닫는다. 더 가까운 곳에 새로운 우물이 생겼다고. 이끼같은 생각들이 마음을 비리게 해서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게 만들었지도 모른다고.
어떤 잘못도 하지 않은 연주가 너무 밉다. 나보다 화사한 연주가 부러워서 밉다. 하지만 연주를 부러워하고 미워할수록 되려 내 자신이 싫어진다. 만날 사람도 없으면서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내가 싫고, 눈치보느라 용기를 잃어버린 것도 싫다. 이렇게 망가지는 동안에도 연주는 사건이 생겨야 나를 찾는다. 역시 나뿐이라면서. 지고지순한 조강지처 그립다는 듯 찾는다. 네가 잘못한 걸 나한테 와서 털어놓으면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나는 성인군자라도 되는 듯 양쪽 모두에게 공평히 말한다. 나한테 실망하거나 속상해하면 안되니까. 객관적인 해결책도 피한다. 이렇게 치졸한 속내를 가지고도 앞에서는 영원한 친구로 남을 것처럼 군다. 너처럼 잘난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될까 무섭다. 오랜 시간 외로워질까 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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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이 조용하다. 원래 같았으면 여기저기 뭉쳐있어야 하는 동기들도 없다. 강의실은 시계 초침 소리만 희미하게 들린다. 낯선 분위기의 강의실을 천천히 살핀다. 나는 누군가를 찾으려는 것 같다. 칠판과 가까이 앉은 뒷모습이 보인다. 누구인지 떠올릴 수 없었지만 찾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그 사람은 아직 움직임이 없다. 나는 다가간다. 주저 없이 입이 벌어지고 목에 핏대가 선다.
네가 미워 연주야. 질투가 나. 내가 못하는 걸 네가 다 해서 부러워. 못 받는 걸 다 받아서 부러워. 나보다 잘 나서. 그걸 나는 너무 잘 알아서 미워.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너 같아. 네가 너무 소중하면 대단하게 미워질수도 있나봐. 마음이 넓어지지 않아. 내가 이런 사람인걸 알고 있었다고 해주라. 그래도 옆에 있었던 거라고 해주라. 나는 내가 싫어. 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사람들을 의심하는 모습이 싫어. 이제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고 싶어. 나 좀 도와주라. 나 좀 나한테 다시 돌려줘. 제발.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숨만 뻑뻑하게 왔다갔다 한다. 나를 등지던 뒷통수가 천천히 돌아간다. 조금 더 있으면 얼굴이 보일 것 같은데 넘어지듯 눈을 떴다. 내입이 향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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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