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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선아 May 10. 2023

<딱궁이> 이타적인 이기주의자 (2)

입하(立夏)호, 첫째 주




단편 소설 - 이타적인 이기주의자 (2)

* 분할 연재됩니다. *




***

 

 

     셔틀을 타면 항상 강의시간보다 일찍 도착한다. 한 시간 정도 남는 시간에 나는 인문학관 옆 흔들의자에서 시간을 보낸다. 언덕을 올라 풀숲 한가운데에 있는 곳이라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 조용하게 혼자 쉬기 좋은 공간이다. 오늘도 학생회관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올라간다. 벌써 카페 포인트가 많이 쌓였다. 나중에연주도 한 번 사줘야지. 흔들의자와 점점 가까워지는데 의자가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아는 사람이 별로없을 것 같았는데.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이제 와?


    진호의 목소리였다. 그럼 그렇지.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진호는 자신의 가방을 무릎에 올려두어 옆자리를 비워줬다.


     있는 줄 몰랐는데.

     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


    우리는 전공 조별 과제를 하다가 친해졌다. 정확히는 이곳에서 몇 번 대화하다 친해진 거다. 한적한 흔들의자를 서로 자신만의 장소라고 정해둔 것이다. 오늘같이 일찍 도착하는 날에는 거의 꼭 마주친다.


      그때 얘기했던 건 잘 해결됐어?


     진호는 며칠 전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진호는 고민이 생겨도 털어놓기만 하지 않고 여러 질문들을 건넨다. 사람을 볼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든지, 솔직함에 기준이 있다면 어떻게 선을 정할 것인지.나는 영양가 없는 대화와 일방적인 감정토로에 질려있었다. 그런 나에게 끊임없는 사유를 도와주는 친구다. 진호는 대답 없이 내 커피를 가져가더니 뚜껑을 연 채로 들이켰다. 이럴 때는 먼저 물어보지 않고 상대방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맞다. 추천해 준 기형도 시집. 그거 빌려서 읽어봤는데 너무 좋았어. 읽는 내내 우울한 게 네 생각이 많이나더라.

      그치. 나도 몇 번이고 다시 읽었어.


     진호가 시집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내 추천은 흘려들은 줄 알았다. 작품의 분위기가 줄곧 어떤지 파악했으니 제대로 읽었나 보다. 왠지 진호가 나를 가벼운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추천해 준 책을 읽어줬다고 이런 착각을 한다. 조금 창피해졌다.


     나는 요즘 다자이 오사무 전집 읽고 있어. 인간실격 처음 읽고 완전 감겨가지고.

   

     진호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제목은 ‘만년’이었다.


     기형도 시인 추천해 준 거면 너도 분명 좋게 읽을 것 같아.


     두꺼운 책이 기분 좋게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끝까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잠들어야 내일이 덜 피곤하다. 잠들어야 한다면서 이어폰을 꽂았다. 누우면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시간이다. 동시에 나를 꼼꼼히 갉아먹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 전화돼?


    숨김 친구 목록을 한참 구경하고 있었는데 진동이 울렸다. 진호다. 이 시간에 갑자기 전화 여부를 묻는다는 건 내게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맥락 갖출 필요 없이 급하게 떠들 말이 있거나, 잠에 들지 못하게 하는 고민을 해결하고 싶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진호는그럴 사람이 아니다. 목적이 있었더라도 항상 의미 있는 대화를 만들어주니까. 답장을 하려는데 듣고 있던 노래가 끊겼다.


      여보세요. 어. 역시 안 자네. 지금 전화할 수 있어?


    진호랑 주로 연락하던 시간대가 새벽이다 보니 당연히 안 자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 것 같다.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인형에 기댔다.


      누워있었지. 무슨 일 있어?

      연주 있잖아. 너랑 같이 다니는 애. 우리 과.

      응. 연주는 왜?

      남자친구 있다고 했었지? 


     예전에 진호와 대화했던 게 생각났다. 매번 연주랑 붙어 다니는 나를 보고 우리가 어쩌다 친해지게 된 건지 물어본 적이 있다.


     맞아. 이제 곧 1년 채우지.

     그렇지…. 그래, 기억난다. 연주는 나 알아?

    내가 너 얘기 몇 번 해서 알 거야. 그리고 우리 다 같은 과잖아.


     진호는 말이 느려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기전에 망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호는 말을 잇지 않고 한숨만 쉬었다. 이번에도 나는 먼저 묻지 않고 기다렸다.

    혹시 연주한테 내 얘기 좀, 그러니까, 아…. 어떻게 말해야 하냐.

     이어달라고?

     어? 이어달라는 건 아니고 얘기를…. 아니다. 맞아.


    연주 얘기를 왜 꺼내나 했더니 자기를 좀 도와달라는 요지였다. 남자친구가 있는 건 알지만 호감이 있으니까 어떻게 좀 도와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을 것이다. 속에서 알 수 없는 열등감이 치밀었다. 민망한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분명 실망이었다. 새벽이길어질 것 같아 전화 화면을 돌려놓고 인스타그램을 켰다. 나는 내키지 않을 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물도 한 컵 떠와야겠다.

 

     우리 수요일 전공 있잖아. 연주가 저번에 내 앞 대각선 자리에 앉았었거든. 가방을 뒤적이는데 손이 너무 작아. 귀여워. 남자친구가 있는데 반지는 왜 안 끼고 있었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저번 수업 자료를 못 찾는 거 같더라고. 내 거를 줄까 싶다가 뭔가 느낌이 오는 거야. 같이 돌려보는 게 나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나 있으니까 보다가 달라 했지. 근데 잠깐만 하더니 결국 프린트를 찾았어. 찾았다고 보여주면서 웃는데 그게 너무 예쁜 거야.


     시간은 새벽 세 시를 지나는 중이었다. 목이 점점 감기고 눈도 감기기 시작했다. 안 오던 잠이 이런 식으로 온다.


      미안. 졸리지.


     몇 분간 반응도 안 하고 얘기만 들었더니 진호가 물었다.


     괜찮아. 너 전화 오기 전에도 못 자고 있었어. 계속 말해.


     하품이 나오려던 걸 삼키며 대답했다. 어차피 하고 싶은 말 계속할 거면서 졸리냐고는 왜 물어보는 걸까. 졸리다고 하면 옳다 커니 하고 끊어주기라도 할 건가. 미안하지도 않은가 보다. 너는 내뱉으면 그만이지만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된 사람도 생각해 줘야지.


     너랑은 정말 얘기가 잘 통해. 좋아하는 것도 겹치는것 같고. 근데 너 혹시 연주 이상형 알아?


     지금 내 옆에 있지 않아도 연주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진호까지도. 똑같은 사람들. 이상하리만큼 나와 좋게 엮이지 않는 주변들. 정말 좋아하고 그래서 미운 내 친구 연주의 칭찬만 몇 시간을 들으면서 나는 응, 그렇지, 맞아. 어쩌면 내가 받는 고통은 다 내 잘못이 아닐까. 짜증 나도 참고, 슬퍼도 참고, 서운해도, 기분 나빠도 참고. 사실 갖고 싶었으면서 양보라는 그럴싸한 선행에 숨어 편하게 남 탓만 하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모르겠지. 왜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좋게 봐 주는 걸까. 나는 나를 지치게 하는 너희들이 정말 싫다. 그런데 이런 마음도 다 내 잘못 같다.


   전 여자친구랑은 되게 싱겁게 헤어졌거든. 얘기해 준 적 있나?


     이제 정말 끊어야 할 때가 왔다. 진호는 자기 과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호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 큰 속단이었다.


     진호야. 잠깐만. 엄마 깬 것 같다. 내일 학교에서 다시 얘기하자.


     짧은 인사 후 전화를 끊었다. 창문으로 어둡게 푸른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성을 다해 남의 사랑 걱정을 들었다. 진호는 그동안 나와 나눴던 대화들이 다 별것 아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와 잘 통한다고 말했던 것도 지금 몇 시간을 위한 계획이 아니었을까.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앞으로 남자친구 있는 애한테 엄한 남자를 들이밀게 생겼으니. 이제부터 나는 연주에게 문득 진호를 언급할 것이고, 셋을 포함한 술자리가 필히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될 걸 안다. 나는 거절을 못 하고, 부탁은 희생해서라도 들어주기 때문이다.

 


 

***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오늘 기분 좋으니까 커피는 내가 사줄게.


     연주가 먼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어깨에 간신히 올라가는 토트백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기분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주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전구를 단 것처럼 분위기에 따라 자유롭게 껐다가 켰다가 한다.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돈을 쓰고, 사소한 것도 잘 기억해두어 센스 있게 행동한다. 연주의 뒷모습을 보는데 자꾸 진호가 생각났다. 진호가 줄줄 설명했던 연주. 나와는 정반대인 모습. 걸음이 느려진 나를 보더니 연주가 팔짱을 낀다. 똑같은 나이와 성별의 친구인데도 이미지가 많이 대비된다. 연주는 나비 같은데 나는 나방 같다.


       너 전공 교재 아직 안 산 거 맞지?


     연주가 입은 옷을 구경하는 건 습관이 되었다. 굽 낮은 구두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걷는 중이었다.


      엊그제 성재랑 교보문고 갔었거든. 우리 교재도 찾아봤는데 딱 두 권 남아있어서 네 것까지 사버렸어. 내사물함에 뒀으니까 다음 수업 때 챙겨가.


      어제 열심히 진호 얘기에 맞장구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는 연주 친구인데. 진호는 부정했지만 무슨 의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말들과 성재의 얼굴이 겹쳤다. 성재도 나를 믿고 있을 것이다.


      맞다. 아까 물어볼 거 있다고 했잖아.


     은은한 로즈빛 눈 화장이 나를 향했다. 누구에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연주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

 

 

     월요일은 수업 하나 들으러 학교에 가는 날이다. 연주가 공강인 날이기도 하다. 혼자 밥을 먹고 1시 셔틀버스를 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우산이 자꾸 발에 걸렸다. 저녁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생각났다. 아까 먹은 제육볶음은 잊어버린 채 쪼그라들며 구워지는 대패삼겹살을 떠올렸다. 비 오는 날에는 삼쏘가 딱인데. 강수 확률은 80%로 높은 편이었다. 이 정도면 연주를 꼬드길 핑계로 충분하다. 어디인지 물어보려고 휴대폰을 켰는데 습관처럼 인스타그램부터 들어갔다. 화면 상단에 붉은 띠를 두르고 활성화된 프로필들이 떠있었다. 며칠째 연락이 없는 연주의 프로필도 있다. ‘지혜 연주, 이대로 괜찮은가’, ‘@jihye_1123’ 라는 문구가 떠있는 짧은 동영상이었다. 영상 속 연주는 들뜬 웃음소리로 어떤 손과 함께 건배를 하고 있었다. 어제 저녁에도 지혜라는 사람과 함께 있는 스토리가 올라왔었는데. 아마 같이 외박을 한 것 같다.우리 채팅방에는 내 차례에서 끊겨있었다.


     연주는 4일째 연락을 안 본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만나기도 했고, 밥도 같이 먹었지만 따로 연락은 이어지지 않는 중이다. 수업 끝나기 무섭게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가는 일이 잦다. 많이 바빠 보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연락을 못 볼 수가 있나. 하루 종일 핸드폰을 끼고 사는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기분이 나쁘다. 귀찮아서 미리 보기로 뜬 것만 보고 놔둔 거겠지. 당장 다른 관계부터 챙기고 한결같이 잘해주던 친구는 잠시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거겠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연락에 답장하는 건 자기 자유니까. 그래도 우리는 그냥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서로가 서로 때문에 외롭지는 않게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닐까. 어디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어디인지 알게 되어 거듭 보낼 말이 없다. 뭐 하는지 알게 되었고, 누구랑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연주를 꼬드길 핑계도 있었지만 소용 없어졌다.


     나는 연주를 제외하면 무엇이든 쉽게 제안할 친구가 없다. 하지만 연주는 나 없이도 즐겁게 잘만 지내는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니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몰래 즐거워했으면 좋겠다. 이제 지나가는 사람의 웃음소리도 듣기 싫어진다. 친구가 필요할 때는 다들 바쁘다. 외로워도 나를 먼저 찾아주는 사람이 없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약속이 생기지 않는다. 하루에 대한 질문이 오지 않는다. 뭐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지않는다. 관심이 없으니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내가 멈춰있으면 모두 같이 멈추는 걸까. 한 번도 다가와준 적 없다. 괘씸해서 나의 어떤 소식도 먼저 전하지 않는다. 질문이 없다면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외로워진다. 해결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사람이 싫은데 자꾸 찾게 된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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