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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시멘트 벽이 있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의 변주

by 사객

오늘 뉘엿한 저녁 이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

어쩐지

이 회색 시멘트벽에

화려한 외제차의 헤드라이트가 눈부신 불빛을 내어던지고

다리지도 않은 싸구려 양복이 초라한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콤 짭짤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벼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이 회색 시멘트벽에

공부해서 성공하라는 엄한 아버지가 있다

사람 구실은 하고 살라는 엄한 아버지가

이렇게 시꺼멓게 고독한 밤공기를 수도 없이 맡으며

그 매캐함에 콜록대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

아니 나를 사랑해 준 불쌍한 사람이

어느 역사 다 허물어 가는 포장마차에서

그녀의 볼품없는 남자친구와 마주 앉아

싸구려 안주에 소주를 한 잔 부어 먹는다

지금의 나와 그때의 그녀가 씁쓸히 건배한다

그런데 또 뜬금없이 어느 사이엔가

이 회색 시멘트 벽엔

내 핏기없는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텍스트가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왜 살아가고 있는가?

배를 주린 적도

해진 옷을 입은 적도

약값이 없어 죽을 위기를 넘긴 적도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 본 적도

꿈을 위해 내 자신을 내던진 적도

없는데

그리고 이 거리를 걸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무섭게 차가운 것으로 어려운 것으로 고독으로 분노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혼내듯이 나를 채찍질하는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나의 자아를 부수듯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자고로 사람이라면 모두

덧없고, 불안하고, 낮고 한심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고독과 분노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스스로에 실망하고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드신 것이다

예수와 석가와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우리네 어머니와 아버지와 떠나버린 옛 연인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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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329_112524355_02.jpg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원작 - 출처: 백석 전 시집 (스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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