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 며칠간의 피로가 쌓여서 그럴까? 눈을 떠보니 오전 9시가 넘은 늦은 시각. 오랜만에 달콤한 늦잠을 자서 피곤함이 조금은 사라진 듯했다. 10시 30분까지 아침 조식이 가능했기에 우리 가족은 9시가 넘은 시각에 여유롭게 호텔조식을 즐겼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날짜를 보니 이탈리아 여행도 벌써 절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을 포함하여 이탈리아에서 남은 시간은 이제 5일. 며칠 남지 않았기에 더욱 열심히 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정은 피렌체의 하이라이트인 우피치 미술관과 두오모 성당 (피렌체 대성당) 방문하는 것. 미리 예약 티켓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며칠 전에 대행사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티켓을 구매해야만 했다. 대신 일반 티켓은 무조건 대기해야 하는데, 우리가 구매한 티켓은 입장 시간이 확정된 것이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오전 11시 30분, 두오모 성당은 오후 4시 30분 입장이었기에 여유 있게 피렌체 여기저기를 둘러볼 수 있을 듯했다.
우리 숙소에서 우피치 미술관까지는 정확히 5분 컷이었기에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여유롭게 미술관으로 향했다. 어제 오후에 들렸던 베키오궁을 지나서 바로 앞에 위치한 우피치 미술관 입장하는 곳으로 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1시 30분 대기라인에 서서 입장을 준비했다. 티켓을 확인하고 간단한 짐 검사 후에 미술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은 피렌체 최고의 미술관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다양한 미술과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과거 메디치 가문에서 가지고 있던 다양한 작품들을 피렌체 시에 기부하면서 1765년부터 대중들에게 개방이 되었고, 1865년부터 정식 박물관이 되었다. 이곳 우피치 미술관에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렘브란트 등 세기의 천재 화가들의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 있기에 피렌체에 들리면 꼭 가봐야 하는 장소 중이 하나이다.
우리 가족도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서 세기의 명작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미리 여행 가이드북을 구매했고, 이를 들으면서 미술관 2층으로 미술품 감상을 시작했다.
2층 복도에서 처음 접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중세 시대의 작품들이었다. 며칠 전 바티칸에서 본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여서 간단히 오디오 설명만 듣고 지나갔다.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산드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작품. 교과서 속에서만 보면 비너스의 탄생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것만으로 감동이었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사랑과 미를 상징하는 비너스가 바닷가에 상륙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배운, 바로 그 그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멍하니 비너스의 탄생을 지켜봤다. 앞에서 관람했던 가톨릭 그림들과는 다르게 인간을 표현하는 모습이 당시로서의 정말 충격적으로 느껴졌을 것 같았다. 이러한 과감한 변화가 답답하고 어두웠던 중세의 벽을 붕괴시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봤다.
비너스의 탄생
우피치 미술관은 긴 복도를 한쪽 끝에 두고 전시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중고등학교의 교실처럼 하나하나 새로운 작가와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가득했다. 아이도 의미 있는 미술품을 찾아가면서 열심히 오디오 가이드북을 들어가며 새로운 예술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공대 출신인 나에게도 그 경험은 너무나 새롭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를 표현하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그것들은 역사의 일부였고, 세상을 바꾸는 매개체였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관람하니 복도의 끝에 도착을 했고 그곳에서는 다양한 조각품들이 우리 가족을 맞이해 주었다. 살짝 창 밖 풍경을 살피니 미술관 앞의 아르노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사실 우피치(uffizi)는 이탈리아어로 사무실을 뜻하는 것이고, 처음에는 치안 판사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때문에 이렇게 사무실처럼 미술관이 지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반대편 복도로 넘어가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방이 있었다. 방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 우피치 미술관에는 수태고지와 동방박사의 예배라는 다빈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수태고지는 뭔가 각도가 이상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그림이 아래쪽에서 틀어진 각도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그렸다는 것. 역시 다빈치는 계획이 다 있었다. 의도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천재답게 계산된 그림이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수태고지
다빈치관을 지나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 이태리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들도 볼 수 있었다. 유명 작가들의 방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글로만 보았던 그들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것만으로도 인생 최고의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 그림을 마지막으로 2층에서의 전시작품 감상을 마무리하니 1시 30분 정도가 넘은 시간이었다. 절반 정도 본 듯한데 무려 2시간 정도가 지난 것. 조금 속도를 내야 했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그림
빠르게 1층 전시실로 내려와서 남은 작품들을 감상했다. 르네상스 이후의 작품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인물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메디치 가문의 그림들이 많았고 역시 부와 명성을 지난 가문인만큼 자태와 옷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러움 그 자체였다. 1층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작품은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메두사라는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티치아노가 1538년 그린 작품으로 가장 완벽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림으로 꼽힌다. 후대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장미꽃은 비너스를, 강아지는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카라바조의 메두사. 바로크 시대 대표화가인 카라바조가 방패에 그린 메두사. 정말 사실적이고 섬뜩한 느낌을 그대로 주는 그림이었다. 그 강렬함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티치아노)와 카라바조의 메두사
이들 그림을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의 우피치 관람은 마무리되었다. 시계를 보니 2시 40분. 3시간 10분 정도 우피치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있으면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을 보고 느낀 시간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 이탈리아의 역사를 보고 나온 기분이었다. 3시간이 넘도록 한 번 앉지 못하고 관람을 했기에 배가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파스타와 피자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음 여행지인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다.
내 서른 살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만나기로, 어때?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온 대사말이다. 오늘의 마지막 여행지는 바로 두오모 성당.
아내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하여 방문하게 된 곳이다. 사실 이곳의 명칭은 피렌체 대성당(이태리어로 Duomo di Firenze)이다. 대성당이라는 말이 이태리어로 두오모. 때문에 우리는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공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지만 너무 복잡하기에 쉽게 따라 부를 수 없다. 이 성당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돔으로 유명하며, 실외는 하얀색으로 윤곽선을 두른 초록색과 분홍색의 대리석 판으로 마감되어 있다. 피렌체에 들리면 꼭 가봐야 하는 것으로 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런 엄청난 건축물이다.
오늘 우리는 4시 30분 티켓을 예약해 두었다. 성당 가장 위에 있는 돔으로 오를 수 있는 티켓이었다. 오르는 계단이 상당히 좁아서 가방을 가지고 갈 수 없기에 예매한 티켓을 가지고 가방을 안내소에 맡겨야만 했다. 간단한 지갑이나 물통, 작은 크로스백 정도만 가능했다.
4시 30분이 되니 입장이 시작되었다. 우리 타임은 약 30명 정도로 보였다. 티켓을 체크하고 계단을 올랐다. 수백 년 전에 지어진 좁고 좁은 계단길을 올랐다. 올라가는 시간은 약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앞사람을 따라서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겼다. 10분 정도를 오르니 중간 지점이 나타났다.
두오모 성당에 오르는 중간 지점
이제 절반 정도 올라온 듯했다. 내려오는 사람들과 교차해야 했기에 잠시 중간 지점에서 대기해야 했다. 아래로 잘 정돈된 성당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고, 위쪽으로는 둠 아래로 화려하게 그려진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바티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화려한 그림들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들 거친 숨을 돌려가면서 그곳에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반대로 내려간 이후에 다시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이곳부터는 경사가 더욱더 가팔랐다. 실제로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마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보는 피라미드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올라갔을까? 저 멀리서 광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이었다. 실제로 약 20분 정도가 걸린 듯했다.
정상에 오르니 가장 먼저 신선한 공기가 나를 반겨줬다. 그리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정상에 온 것을 반겨주는 소나기 같았다. 눈을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성당의 꼭대기가 보였고 뒤를 돌아서니 피렌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상에 올라서 전망대를 한 바퀴 돌면 피렌체 동서남북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탈리아에 와서 본 광경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에 잘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도 그 아름다운 풍경에 심취된 듯했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피렌체 가장 높은 곳에서 보이는 그림 같은 모습을 담았다.
남동쪽으로 오니 조토의 종탑도 눈에 보였다. 매시간마다 멋진 종소리를 전달해 주는 시계와 같은 종탑이었다. 살포시 저 멀리 종탑 위에서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 가족도 그들을 향해서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은 저 종탑을 올라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고 싶었다. 소나기가 지나가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10여분 정도 돔 정상에 머물렀다. 사실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영화 속 그림 같은 경치를 즐기며 가만히 있고 싶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관리자가 우리에게 이제는 내려갈 시간이라고 했다. 아쉬움을 달래며 우리 가족은 다시 성당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경사가 엄청나게 가팔랐기에 방심하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손잡이를 힘껏 잡고 천천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온 길 그대로 다시 내려갔다. 다행히 내려가는 길은 그리 힘이 들지 않았다. 아들은 이런 길이 신기한 듯 훌쩍훌쩍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빙글빙글 계단을 돌고 돌며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여분이 조금 넘을 듯했다. 5시 30분쯤 성당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입구로 돌아왔다.
우리는 성당 앞의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멍하니 두오모 성당을 감상했다.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약속의 장소. 그 자리에 온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웅장함에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행복한 두오모 성당. 이탈리아에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삶의 진정한 행복이자, 여행의 기쁨이 아닐까. 멀리 저무는 노을 사이로 환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