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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펭귄 Jan 13. 2021

엄마가 날 사랑한다는 걸 몰랐으면 좋았을 걸


  그냥 요즘 들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은 엄마와 24시간 찰싹 붙어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지만, 예전부터 엄마와 이렇게 친밀한 사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냥 딱 평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평균 정도인 모녀였다.


  기독교에서 서로를 더 깊이 알고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5가지 사랑의 언어'로 사람마다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는 각자 다른 다섯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자신의 사랑의 방법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일종의 테스트다.


  1. 봉사

  2. 선물

  3. 인정하는 말

  4. 스킨십

  5. 함께하는 시간


  이 중에서 나의 사랑의 언어는 '선물'이었고, 엄마는 '봉사'였다. 나는 주로 선물을 통해 내 마음을 표현했고, 엄마는 봉사를 통해 마음을 표현했다. 엄마와 자녀라는 관계의 포지션에서 엄마의 사랑의 언어인 봉사는 겉으로 봤을 때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엄마가 나를 위해 값없이 주었던 그 수많은 봉사 행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엄마들도 다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엄마가 나를 특별히 많이 사랑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가 하면 엄마도 내 사랑의 언어인 선물에 크게 감동받거나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급식이나 간식으로 맛있는 음식을 받게 되면 늘 엄마에게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싸와서 건네곤 했는데, 엄마는 내가 가져다준 음식을 막내인 동생에게 줘버리거나 편지를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통에 버릴 때도 있었다. 공들여 건넨 사랑이 배신감으로 돌아왔을 때 내 작지만 소중했던 마음은 쉽게 상처를 입곤 했다.     

  

  지금은 나름 아싸 중의 인싸처럼 살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편이어서 엄마와도 썩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다. 엄마는 겁이 많고 걱정이 많은 성격인 데다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편이었기 때문에 사춘기 소녀가 걱정을 털어놓거나 고민 상담을 하기에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중학생이던 시절, 하루는 속상한 일이 있어 내 방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숨죽여 울다가 엄마에게 그 모습을 들켰다.


  - 왜 울어?

  - ......

  - 왜 우냐니까.

  - ......

  - 네가 그렇게 울면 엄마가 속상하잖아. 울지 마.


  엄마는 늘 이런 뉘앙스로 말했고, 어렸을 때부터 이런 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린 나의 머릿속엔 어느새 이런 알고리즘이 박혔다.


  내가 울거나 슬퍼하면 엄마가 속상하다 -> 하지만 살면서 울지 않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 엄마가 나 때문에 속상하면 안 되니 내 슬픔을 엄마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갓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던 스무 살, 갓 성인이 되었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버거운 시련이 찾아왔다.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엄마가 놀라고 걱정할 거라는 걸 뻔히 알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었다. 이럴 때 엄마가 내 편이 되어준다면 참 좋을 텐데. 결국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채 잠든 엄마의 머리맡에서 늘 그렇듯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은 미련했으나 그게 엄마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인데, 서로의 마음 길이 어긋나 생긴 상처는 어느 순간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서글픈 생각으로 변질되었다.




  입시를 치르느라 정신없고 매일 야자를 했던 고등학교 시절과 신문사며 동아리를 하기에 바빴던 대학교 시절 동안 나는 늘 아침에 나가서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곤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동안 엄마가 퍽 서운하고 외로워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엄마가 루게릭이라는 기가 막힌 병을 얻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엄마와 오랜 시간 붙어있게 되었다. 둘 다 스킨십을 썩 좋아하지 않아 엄마가 아프기 전에는 스킨십도 자주 한 적 없었는데 엄마의 곁에 오랫동안 누워있기도 하고 마를 대로 마른 몸을 꼭 안아주기도 하고, 퉁퉁 부은 온몸을 주물러 주며 엄마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평소에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엄마는 주간병인이자 20대인 나의 앞길을 자신이 막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괴로워했다. 취업을 못하는 것도 모아둔 돈이 없는 것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도 전부 자신의 탓이라며 빨리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아픈 사람이 제일 서러울 텐데, 엄마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닌데, 엄마 잘못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진짜 괜찮다고 해도 엄마는 자책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위루관을 통해 식사를 하게 되면서 1년이 넘게 입으로 음식을 먹지 못해 항상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었을 텐데도 오히려 사지가 멀쩡한 내가 식사를 거르진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내가 짜장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짜장면을 자주 사주고 싶었던지, 이틀에 한 번은 짜장면을 먹으라고 자음판으로 얘기하곤 한다.

  본인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지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나한테 짜장면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엄마는 이래서 엄마인가? 엄마의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마음과 사랑을 나는 아마 평생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아.


엄마는 늘 말하지, 곱배기를 먹으라고.



  엄마를 돌봐온 5년은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고 엄마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도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과연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굳이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엄마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고 흔히들 말하는 평균 수명인 5년도 어느덧 다 되어간다.

  이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마가 너무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엄마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서 엄마를 도무지 떠나보낼 자신이 없다. 엄마가 떠나고 나면 앞으로 이 세상에 나를 이렇게 사랑해 줄 사람은 없을 거란 확신도 매일매일 선명해진다. 중학교 때와는 다른 이유지만,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슬퍼질까 봐 나는 여전히 화장실이나 내 방 귀퉁이에서 몰래 흐느껴 운다.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매일 더 쇠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이란 얼마나 지독하게 잔인한지 모른다.


  엄마,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차라리 몰랐다면 지금보다는 덜 힘들었을까?

  엄마를 너무 많이 사랑하게 돼버려서 나 되게 힘든가 봐.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겠다고-

  요새 자꾸, 그런 생각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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