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펭귄 Mar 02. 2021

내가 계속 케이크를 만들 수 있을까?

역대급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리움을 견뎌내야만 가까스로 살아낼 수 있는 날들이 되었다. 이별을 겪은 후의 매일매일이 그랬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엄마가 아프기 전의 날들을 가끔씩만 그리워했다. 아주 가끔만 그리워하려 노력했다. 자주 그리워하기에는 너무 힘에 겨웠으니까.

  사실 그리움은 엄마를 떠내보내고 난 이후의 슬픔 중에서도 아주 뻔하게 예상 가능한 문제였다.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기인한 여러 가지 장르의 슬픔들이 있었지만 사실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슬픔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프고 더 힘들었다.  

  슬픔을 통제하기 위해 엄마 생각을 최대한 덜 하려고 노력했고,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물건들을 치웠다.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무지 회피할 수도 제거할 수도 없는 거대한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를 간병하며 운영해 온, 나의 조그만 케이크 가게!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한 지는 벌써 4년 정도가 되었다. 그중 2년은 휠체어에 앉은 엄마 곁에서 연습을 하며 기술을 익혔고, 1년은 조그만 원룸을 얻어서 수업을 했고, 지난해 1년은 공방으로 나와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설렐지 모를 첫 시작이었지만 엄마의 투병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제대로 운영하지는 못했다. 엄마가 입원이라도 할라치면 한 달씩 가게 문을 닫는 것도 예삿일이었고 매번 손님들에게 장문의 사과와 함께 예약된 케이크 비용을 환불해드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이 작은 공방은 내가 간병인으로서만 살지 않도록, 먹고살 수 있도록,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도와준 더없이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고 케이크를 만드는 일은 나에게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이었다.


 (공방 창업기는 여기에)

 https://brunch.co.kr/@wyverns14/15


  장례를 치르고 제주도에 다녀온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공방으로 갔다. 시리도록 추운 날이었고 한 달 넘게 방치된 공방은 엉망이었다. 사람이 없는 걸 귀신같이 알았는지 모서리에 희미하게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날도 추우니 서둘러 청소를 해야 할 텐데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가 집에 없으면 늘 불안해했기 때문에 나는 한 번도 공방에서 맘 편히 있어본 적이 없었고 일이 끝나면 늘 설거지도 제대로 못한 채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패딩을 입은 채 히터를 틀고 그 앞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일할 때는 늘 1분 1초가 모자라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게 빠릿빠릿 움직이곤 했는데.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엄마의 부재를 저리도록 실감하게 했다.

  기다리는 이가 없어서 그런가 도무지 예전처럼 부지런해지지 못해서, 청소를 하는 데는 꼬박 사흘이 걸렸다.   


  더 큰 문제는 며칠 후에 첫 주문 케이크를 완성하고 나서 드러났다. 엄마는 내가 만든 케이크를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완성한 케이크를 가지고 집에 오는 순간을 열심히 기다렸다. 주문제작 케이크인지라 매번 디자인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컨디션이 안 좋아도 꼬박꼬박 고개를 돌려 케이크를 구경하고는 나름대로의 피드백을 주곤 했다. 자신을 돌보느라 취업은 하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경험한 창업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열심히 헤쳐나가고 있는 딸을 엄마는 어떻게든 돕고 싶어 했다. 창업 초기에는 걱정도 많이 했지만, 조금씩 늘어가는 주문과 발전하는 케이크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 어쩌면 그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엄마의 일상에 아주 사소한 구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 뒤 오랜만에 첫 주문 케이크를 만든 날 깨달았다. 엇, 엄마가 없다. 케이크를 만들었는데, 이제 엄마한테 보여줘야 하는데. 보여줄 엄마가 없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모든 생각이 일시 정지되었다. 그 새삼스럽고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 패닉이 찾아왔다. 가지런히 묶은 리본이 달린 케이크 상자를 든 채로.


  "선생님, 저 케이크 이제 못 만들겠어요. 다른 걸 찾아보려고요. 아니면 이제라도 취업을 하든지."

  친하게 지내는 다른 케이크 가게 선생님들에게 이야기하자 다들 기겁을 하며 나를 뜯어말렸다. 여태 고생해 놓고 왜 이제 와서 그만두냐고, 지금까지 해온 게 너무 아깝지 않냐고 했다. 완성된 케이크를 보여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솔직한 이유를 얘기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언니뿐이었다. 둘이서 나란히 누운 그날 밤 언니에게 그간의 절망을 털어놓았다.

  "하루에 케이크 대여섯 개 만드는 날도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 하나하나 만들 때마다 이렇게 엄마 생각이 나면 어떻게 만들어. 난 못할 것 같아..."

  아이처럼 흐느끼는 내 곁에서 언니도 가만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케이크를 만들고 난 뒤 처음으로,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절망이 밀려왔다.


  몸이 아프거나 뭔가 큰일이 있지 않은 이상 케이크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루게릭 환자인 엄마를 돌보며 그 곁에서 밤새워 연습하며 키워 온 꿈이었고, 그로 인해 엄마가 기뻐했기 때문에 참 고맙고 소중한 직업이었다. 그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취업에서 창업으로 진로를 틀었기 때문에 사실상 엄마 때문에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케이크를 만들면서 이렇게 엄마 생각이 많이 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절망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엄마의 예전 사진을 보며 추억을 더듬다 엄마가 했던 자음판 중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에 이 자음판을 발견하고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울었다. 절망에 빠져 있는 내게 마치 지금의 내 상황을 알고 엄마가 천국에서 나에게 해주는 말인 것 같아서. 창업 초기에 케이크 주문이 별로 없어서 걱정할 때마다 호흡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는 나의 사랑하는 엄마는 남몰래 나를 위해 속으로 기도를 해주곤 했다. 오늘은 예약이 제법 있었다고 자랑하면 다 자신이 기도해 줘서 그렇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 나는 케이크를 하나하나 완성할 때마다, 장사가 안 되던지 잘 되던지 매번 엄마를 떠올려야 한다. 엄마의 부재를 강제로 실감하고 그 빈자리를 천천히 더듬으며 부지런히 외면해 온 그리움을 마주해야만 한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내내, 아마도 내가 살아 있는 한 평생.     

   그 시간들이 많이 두렵다.






  우선 상가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는 케이크를 계속 만들기로 했다. 오늘도 완성된 케이크를 빤히 바라보며 사랑하는 엄마를 생각했다. 힘든 중에도 나와 케이크를 기다리던 엄마, 냉큼 돌아누워 케이크를 구경하던 엄마의 동그랗고 반짝거리던 눈이 사무치게 그립다. 오늘의 케이크도 보여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걸.

  엄마, 있잖아

  엄청 많이 보고 싶어.

이전 04화 'Warriors'를 들으며 사망신고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