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별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병원에 간 적이 거의 없어서였다. 기껏해야 길지 않은 통원치료가 전부였던 내게 간호사란 그저 진료를 받을 때 의사 선생님 곁에 서서 이런저런 일들을 돕는 존재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누군가가 모 대학병원에 갔다더라, 하는 류의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정작 친한 사람 중에서는 간호사가 없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내 묵상은 늘 얕은 데서 끝났다.
작년 겨울의 길디 길었던 세 달짜리 첫 입원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병원 생활이었다. 그리고 병동에서 간호사는 정말이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우리가 입원한 병원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동네의 종합병원이었는데, 20개 호실 정도를 가진 병동에는 20여 명의 간호사가 3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마스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간호사들의 특징에 따라 별명을 붙여 부르곤 했다. 단발 간호사님, 안경 간호사님 이런 식으로. 입원한 지 2개월이 지나자 얼추 20명 넘는 간호사들의 별명을 다 지을 수 있었다.
병동에서는 작은 것에도 마음이 쉽게 상했다. 몸이 아픈 환자들은 바늘을 잘못 꽂기만 해도 빠르게 성을 냈다. 고된 간병 생활에 지친 보호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날 선 말투 하나에도 쉽게 상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프로 간병인의 자질 중 하나였다. 병동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죽어나갔고 나는 간호사들은 죽음에 무뎌졌을지 궁금했다. 작년 1년 동안의 1/3을 병원에서 지내면서 정말 내 생을 통틀어 특이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간호사들은 그 특이한 사람들을 일상처럼 만나고 있었다. 내 코가 석 자였지만, 때론 그런 그들이 종종 안쓰러웠다.
루게릭이라는 희귀병 환자에 그 병동의 유일한 가족 간병인이어서 질문할 거리가 많아 보이는 우리였지만 간호사들은 대개 우리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업무지침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간호사들 중에서 조금 달라 보이는 이가 있었다. 큰 키와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아마도 내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대개 친절하고 조심스러우며 조용조용한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쾌활하고 밝았다. 화장실 문을 활짝 연 채 소변을 보는 환자들을 단박에 응징하는 것도 그녀였다. 엄마가 입원 후 처음으로 얼굴에 욕창이 생겼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한없이 속상해하던 그녀는 그래서 내 기억에 조금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엄마의 상처 부위를 소독해 주던 어느 날, 그녀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 학생이세요?
- 아뇨. 졸업한 지 제법 됐는데요(웃음).
- 어, 그럼 무슨 일 하세요?
- 케이크 가게 운영하고 있어요.
- 헐, 대박. 그럼 원데이 클래스 같은 것도 하시는 거예요?
- 네. 종종 하긴 하는데...
소독을 마치는 동안 지갑을 꺼내 명함을 건넸다. 그녀는 명함을 받아 들고 신나게 사라졌다. 왠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간호사가 사적인 질문을 한 것도, 그 질문에 대답한 것도 처음이었다. 다음 날 새벽 꾸벅꾸벅 졸며 밤을 새우고 있던 나에게 모르는 사람의 DM이 도착했다. 나이트 근무를 서고 있던 그녀에게 온 메시지였다. 이틀 후엔가 우리는 공방에서 만나 그녀의 절친에게 건넬 케이크를 함께 만들었고, 병동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묻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록 내가 빠른 년생이긴 했지만 알고 보니 우리는 동갑이었다. 여러 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는 동안 매번 만난 삭막한 병동에서 나의 간호사 친구는, 외로운 입원 생활에 작은 기쁨이 되어주었다.
엄마를 떠나보내던 날, 장례식장 직원의 손에 엄마를 맡기고 사망진단서를 떼고 수납을 하러 원무과에 갔다. 프린터기를 부드럽게 빠져나와 쌓이는 사망진단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시 근무자가 아니었기에 의아했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걸 알고 있었던 다른 간호사가 연락을 해주었다고 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선생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하는데 목이 메었다. 그녀는 다음날 데이 근무를 마치고 장례식장에 왔다. 확진자가 많던 시기였기에 의료진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다. 다른 조문객들과 마찬가지로 국화 한 송이를 놓고 엄마의 영정사진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 어 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 호흡기 안 낀 모습은 처음 보네요.
- 그러게요..
묘하게 서글픈 조문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나서 그녀가 공방에 놀러 왔다. 우리는 늘 같이 먹으러 가자고 말만 했던 마라탕을 먹었다. 언젠가 그녀가 남자 친구와 수업을 들으러 오겠다며 남겼던 댓글에 나는 '우리가 먼저 가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다'는 답글을 남겼었다. 코로나 시국의 의료진, 그리고 불치병 환자의 간병인. 우리는 엄마가 떠나고 난 뒤에야 가까스로 만날 수 있었다. 마라탕 국물이 평소보다 짰다.
이브닝 근무를 위해 병원으로 떠나는 그녀에게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께 드리고 싶었던 케이크를 건넸다. 돌아보면 수개월간의 입원 생활 동안 감사한 순간이 참 많았다. 엄마의 팔과 발은 늘 퉁퉁 부어 있어 혈관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병실이라도 이동할라치면 최소한 3명의 간호사들이 달라붙어야 했다. 석션기와 산소통이 있는 자리가 나면 바로 알려주러 오시던 수간호사님, 의식이 없어 차가워진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체온으로 데워주던 간호사님, 엄마가 떠나던 날 마스크를 쓰고 울고 있는 나에게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도 된다고 다독여주시던 분. 그리고 나의 간호사 친구까지.
돌아보면 아프지만 감사한 기억들뿐이었다.
간호사 친구가 떠나고 나서 청소기를 돌리다가 별안간 눈물이 터졌다. 당분간 마지막이라는 게 너무 서운했다. 엄마가 이제 더 이상 그 병원에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실감이 났다. 실은 엄마가 떠난 후 몇 주간은 정말 실감이 나지 않아 언니와 둘이서 엄마 안 죽었어,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어. 하는 씁쓸한 농담을 서로 건네곤 했었다. 간호사 친구는 다른 병원으로 이직해서 다음 달부터 다른 지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녀를 보내고 나니 병동에서의 기억과도 이제는 그만 안녕을 고해야 할 것 같았다. 청소기 때문에 우는 소리가 옆 상가에 들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물이 멎을 때까지 평소보다 오래도록 청소기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