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앓고 있는 병이 참 기가 막힌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집에서 간병을 할 수 있는 환자였다. 여든이 훌쩍 넘으신 외할머니는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신다. 코로나로 인해 할머니를 뵙지 못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혹시 이렇게 계시다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고 이모와 삼촌들의 근심이 깊다. 큰삼촌은 일주일에 한 번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전화를 끊고서 한참을 우신다고 했다.
입원한 엄마 곁에서 밤을 새우고 언니와 교대를 할 때도 나도 그랬다. 혹시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배웅해 주는 엄마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떠나곤 했다. 긴 시간 동안 엄마와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 엄마의 마지막 숨결까지 곁에서 지킬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2. 간병 기간 동안 크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간병을 하는 기간 동안 몸도 마음도 제법 상하거나 다칠 법도 한데 다행히 가족 중 그 어느 누구도 크게 아프지 않았다. 아팠다면 엄마를 제대로 돌볼 수 없어 한없이 속상했을 것 같다. 심지어 지난해는 코로나의 여파로 1년 내내 마스크를 쓰고 다니다 보니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휠체어 생활을 할 때는 수도 없이 엄마를 안아서 들어 올렸는데 강인하게 버텨 준 내 허리에게 감사를!
3. 신앙이 있다는 것
이 병이 단순히 재수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창조주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면 지난 시간들을 능히 버텨낼 수 없었을 터다. 덕분에 무너지지 않았다. 또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희망은 먼 훗날 천국에서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단지 그것뿐이다.
기다림이 아무리 길어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4. 돌아올 일터가 있다는 것
루게릭 환자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직업이 세상에 과연 몇 개나 되려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짜 없다. 취업이 기약 없이 차일피일 미뤄지던 시절에 나를 가장 괴롭혔던 두려움은 엄마가 떠나고 나서 내 삶이 너무 별 볼 일 없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나자마자 다시 돌아올 일터가 있음에 감사하다.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큰 슬픔을 마주했을 때는 적당히 바쁘게 살아주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 시간이 없도록, 그 슬픔을 자꾸 떠올리며 아파할 시간조차 없도록.
돌아올 일터가 있어 다행스럽게도 바쁘게 지내고 있긴 하지만,매일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5. 브런치를 시작한 것
가끔 그동안 발행한 브런치 글들을 쭉 읽어볼 때가 있는데, 그 바쁜 삶 속에서 이 글들을 언제 다 썼지 싶은 생각이 든다. 브런치를 시작할지 말지는 참 오래전부터 고민했었는데 이곳에 오래도록 남을 엄마와의 진하게 사랑했던 기억들, 그리고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이 곳이 지금은 퍽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족 외 그 누구에게도 이 삶에서의 솔직한 마음들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날것 그대로의 감정까지도 내비칠 수 있었던 공간이다.
그 시간 가운데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음에 감사!
6. 후회가 없다는 것
먼 훗날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당장의 취업이나 미래를 포기하고 엄마 곁을 지켰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년 동안 정말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사랑했고, 살아냈다.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고 해주고 싶은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한없이 슬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엄마 곁으로 갈 때까지 후회 없이 사는 인생이 되어야겠다.
8. 든든한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는 것
9.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 사랑에 힘입어 이 삶을 살아낼 것이다.
올해의 달력을 뒤늦게 사면서 표지에 문구를 적어준다기에, 어차피 찢어낼 표지라는 생각으로 옵션에서 랜덤 문구를 선택했다. 택배 봉투에서 꺼내 든 달력 표지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