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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펭귄 Oct 28. 2020

우리 엄마가 불치병 환자라니

병마를 받아들이기까지 걸린 시간들


  모든 찰나의 순간들은 시간이 흘러가면 흐릿해지고 빛이 바랜다. 그러나 때론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내게는 그날의 오후가 그랬다.


  엄마가 정확한 근전도 검사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 언니는 병원에 다녀온다며 집을 나섰다. 나는 언니도 엄마도 없는 집에서 홀로 늦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는 상당한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에는 꼭 라면을 먹어야지 싶었는데. 냄비에 라면 물을 받으러 부엌으로 느리게 걸어갔다. 방이 두 개뿐인 우리 집의 거실은 아주 좁았기 때문에, 부엌까지 걸어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구리 우동과 짜파게티 사이에서 제법 긴 시간을 고민했지만 이윽고 늘 그렇듯 너구리 우동을 골랐다. 라면 물을 받고 있는 동안 느리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은 4층짜리 빌라의 꼭대기층이었고 바로 위에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지저분한 옥상뿐이었으므로, 발소리가 들린다는 건 가족 중에 누군가가 곧 집에 들어올 것임을 의미했다. 방음이 잘 되지 않는 탓에 이제는 발소리만 들어도 누구의 발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묵직하고 느릿한 아빠의 발소리, 사뿐사뿐 가벼워서 때론 잘 들리지 않는 엄마의 발소리, 딱따구리가 걸어오는 것처럼 날카롭고 빠른 언니, 그리고 투박하고 거친 남동생의 발소리까지.


  하지만 문 밖으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그중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물을 한껏 먹은 듯 축축하고 기운 없는 발소리는 도통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낯선 발소리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냄비에서 손을 떼고 경계하듯 문 앞으로 다가갔다. 발소리는 문 앞에서 멈추었지만 바로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가만히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넷.


  열린 문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펑펑 울고 있는 언니였다.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언니는 비록 눈물은 많지만 우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해서, 우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둘째인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그냥 울어버려도 붉어진 눈시울로 마지막 순간까지 눈물을 참곤 했던 언니, 그런 언니가 저렇게 아무렇게나 무너진 모습이라니. 언니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저렇게 울면서 걸어왔을까. 머릿속에서 웽-하고 날카로운 사이렌이 울리는 것 같았다. 뭔가 평소랑 달라. 위험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온몸의 모든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엄마... 루게릭병이래."


  물에 젖은 목소리로 언니가 말했다.






  몇 년 전 SNS를 점령했던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물론 나도 본 적 있었다. 사람들은 얼음물이 든 양동이를 몸 위에 뒤집어썼고, 얼음물이라는 극단적인 액체가 주는 짜릿함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유행했던 2014년은 엄마가 루게릭병에 걸리기 불과 1년 전이었다. 그때 무심하게 영상들을 넘기던 내게 이런 날들이 찾아올 줄 예상이나 했을까.


  루게릭병을 확진하는 검사법은 없다. 실제로 병원에서 엄마에게 확진을 내리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불치병 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가족이 받아들이기에도 참 긴 시간이 걸렸다. 시들어가는 엄마를 보는 가족들에게도, 무엇보다 엄마에게 너무 혹독한 시간이었다. 그때는 짐작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으리라는 것을-

  진단은 그저,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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