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 노동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를 읽고

by 재나


p87 욕심을 부릴수록 ‘남자에게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과 ‘남자에게 이기고 싶은 욕망’이 제각각 증식하며 충동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분열했다. 만남을 잘 이어가다가도 반복적으로 폭발하곤 했다. 내가 아닌 모습, 강남 도련님들이 좋아할 만한 참하면서도 동시에 섹시한 여자를 연기해야 한다는 자괴감, 남자는 실력으로 경쟁하고 이겨야 할 상대인데 그런 대상에게 초이스 받아야 한다는 굴욕감, 결국 결정권이 나에게 없다는 데서 오는 분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한 수치심까지. 사실상 남자와의 관계보다 스스로의 내적 갈등과 폭주에 쏟은 에너지가 훨씬 컸다.


p89 ‘남자에게 욕망당하기’는 권력이 아니다. 여자들에게 주어진 미션, 여자끼리의 외모 경쟁이자 남자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위다. (중략) ‘예쁘다’는 찬사는 ‘추한 여성’이라는 낙인보다 더욱 강력하고 교묘한 현실 통제 수단이다. 그 안에 매몰돼 더 이상의 꿈을 꾸지 못하도록 막는다. 우리는 초이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해방되는 순간 진짜 힘이 생긴다. 타인이 아닌 나에게 힘을 돌려주자.


결혼생활이 15년 차를 넘어가면서 여자로서 인정받지, 사랑받지 못했다. 거울 속의 나는 아직 여자로서 나쁘지 않은데 그는 나를 안으려 하지 않았다. 주말부부라서, 시간이 없어서 그럴 것이라고, 같이 살게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다 주말 부부를 마치고 같이 살게 되었지만 그는 나를 안지 않았다. 굴욕감을 느끼면서 이야기도 해보고 안겨도 보다가 그렇게 내 생애에 여자로서의 인생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그의 커다란 톱니에 맞춰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작은 톱니 같던 나, 우울했다.

나는 어떤 것도 욕망하지 말자고 엄마로서만 살자고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 밖으로 보이는 것만이라도,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하는 정상가족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다 그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와 그 집에 더 이상 있으면, 그 생활이 계속된다면 내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별거를 시작했다.


별거 후, 경제활동을 시작하고 나는 누구의 아내가 아닌 내 이름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 시작한 일에 적응하고, 마치지 못한 공부도 마치기 위해 방송대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일과 공부에 좀 적응이 되었을 때, 내 여성성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남자에게 욕망당하고 싶다는 욕구를. 아직 여자로서 매력적이고 남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내가 포기했던 삶을 다시 살아보고픈 욕망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느끼고 행동하고 싶은 나와, 그런 것들의 부정하고 싶은 나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지금,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던 나를, 언어화할 수 있는 해석의 힘을 준 페미니즘 책에서 읽은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가고픈 나와, 내 욕망을 채우고 싶은 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남자에게 욕망당하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나면 이런 것들이 편해질까? 탈코르셋 하고 나에게서 여성성을 없애버린다면 좀 편해질까?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런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44살의 나이에 아직 내 안에 존재하는 여성성, 여자로서 매력을 뽐내고 싶은 나는. 그냥 뚱뚱해지고 외모가 미워지면 당연히 남자에게 욕망당하고 싶은 욕구를 포기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아직도 하나의 인간이기 이전인 여자로서의 나를 놓아주지 못하고 있을까?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인간 재나가 아닌 여자 재나로 채워줘 있어서 아직도 나는 나를 지탱해 줄 힘이 부족한 것일까?


하지만 현실의 나는,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늘도 화장을 하고 귀걸이를 하고 일을 하러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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