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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y 30. 2020

잃어버린 소리

아침에 일어나 홀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시간이 좋다. 내 발이 마룻바닥에 닿아 나는 저벅거리는 소리, 커피포트에서 나오는 보글대는 소리, 책 넘기며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고요함에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슬며시 멜론에서 저장해둔 재즈 음악을 꺼낸다. 시작은 Carl Doy의 ‘l’ll Be Seeing you’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애잔한 선율이 공기를 타고 곳곳에 퍼진다.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따라간다.
 
귀에 닿는 소리가 좋은 건 어릴 때부터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거실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었다. 비는 속도에 따라 소리가 다 달랐다. 처음에는 ‘툭’ 하며 신호를 보내다 천천히 ‘투 툭’ 거리다가 빗방울이 빨라지면 ‘투드드득’ 소리를 높였다. 비를 피해 마당 한구석에 몸을 숨긴 똘이가 보였다. 똘이를 볼 겸 마당에 나가면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다. 똘이를 쓰다듬으며 비로 뒤덮인 세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똘이의 껌벅이는 검은 눈동자에 맞추어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마당에는 다양한 소리가 가득했다. 낮에는 어머니께서 곱게 심어 놓은 꽃들 사이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참새들의 짹짹거리는 소리가 흥겨웠다. 지나는 바람에 스르륵 스치는 나뭇잎 소리는 어떤 계절을 그립게 만들었다. 잠 못 드는 여름밤에는 귀뚜라미가 찾아와 밤새 찌르륵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밤이 내는 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단어로 가둘 수 없는 나만 아는 소리였다. 어두운 밤이면 창틀에 바싹 붙어 그 소리를 탐했다. 투명한 달빛 너머로 그 소리는 더욱 짙어졌다. 가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는데, 그마저도 생소했다. 지금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제 더는 밤을 사랑하지 않게 되어서일까.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는 검은색 네모난 상자에서 나오는 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벌써 누나들은 나와 다른 세상 속에서 둘 만의 비밀을 공유했다. 시샘이 났다. 어느 날 불 꺼진 방에 이불 뒤집어쓴 채 키득거리는 누나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라디오에서는 갖가지 사연이 흘러나왔다. 그중에서도 사랑 이야기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그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 둘이 처음 만난 공원 하늘빛은 파란빛이겠지. 여자가 떠난 뒤 홀로 남은 쓸쓸한 그림자가 보였다.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드는 나는 소리에 이끌려 나만의 상상 속에 빠져들곤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기억의 한 조각은 DJ의 마지막 멘트 후에 흘러나왔던 Richard Sanderson의 ‘Reality’였다. 순간 커다란 수족관 옆으로 수줍게 미소 짓는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TV로 영화 ‘라붐’을 본 순간 가늠할 수 없이 먼 프랑스의 한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 물리적 거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음악이 끝나는 순간까지 심장은 쿵쾅거렸었다.
 
어느 순간 나만의 비밀이 생겼다. 나에게 조그만 라디오가 생긴 것이었다. 나는 심야에 방송했던 정은임의 ‘FM 영화 음악’을 애정으로 했다. 한창 공부를 해야 했던 시절, 오히려 책과 라디오에 이끌렸다. 새벽 1시가 되면 라디오를 켜고 밤에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에 집중했다. 볼륨은 최대한 낮췄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코너는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생소했던 제 3세계 영화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영화의 중요 장면을 원어 그대로 들려주었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DJ의 음성과 교차하면서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늘 중요한 순간 끝이나 버려 궁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어머니께 비밀 행각이 들통나 라디오를 압수당했다. 라디오는 그때부터 내 삶에서 막을 내렸다.
 
어른이 되고부터는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항상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다. 대학 때 한 후배는 멀리서부터 나를 알아본 적이 있다. 이유를 물어보니 항상 이어폰을 꽂고 있는 선배는 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습관처럼 굳어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원래 세상이 가지고 있는 소리를 까먹은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혹여나 세상과 나와의 거리를 두는 것이라 생각하면 비약일까. 가끔 이어폰 배터리가 꺼져서 밖의 소리가 다가오면 흠칫 놀라곤 한다.
 

며칠 전 친구와 산에 갔다. 일부러 이어폰을 놓고 갔다. 산에 오르며 오래간만에 자연이 주는 소리를 그대로 느꼈다. 흙 밟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다람쥐가 숲 사이를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산에 오르며 친구와 나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했다.
 
정상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휙 휙 소리를 내며 내 이마를 연신 살랑거렸다. 친구는 옆에서 연신 “아. 좋다.”를 내질렀다. 그래. 이제는 이어폰을 벗고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여볼까. 그렇게나 좋아했던 어릴 적 그 소리를 하나씩 찾아볼까. 그때랑 지금은 다를까.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을 그대로 둔 채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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