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못 마셨다. 몸 안에 카페인 두드러기가 있는지, 진한 초콜릿만 먹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고등학교 때 밤새 공부한다고 커피 한 잔 마셨다가 정말 한 잠도 자지 못해 시험을 망친 흑역사도 있다.
이런 내가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를 마신다. 직장 생활 13년 차에 는 것은 뱃살과 커피이다. 처음 직장에 들어갔을 때 부서를 돌며 인사했다. 그때마다 과장님들은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담아주셨다. 그것도 커피 봉지로 정성스레 간을 맞추어주시며. 그렇게 대 여섯 잔을 마시고 손이 벌벌 떨려 수전증 있냐는 오해도 샀었다.
직장에 들어가며 커피의 신세계를 접했다. 이건 뭐 커피는 동네 친구 같았다. 출근하면 기본 한잔, 점심 먹고 식후 땡 한잔, 손님 오면 한잔, 오후 나른 해질 때 한잔, 퇴근 전 아쉬워서 한잔. 그 당시 나는 막내라 열심히 커피를 탔다. 믹스 커피라고 모두 같은 것이 아니었다. 물의 양이 중요했다. 과장님은 종이컵 끝까지 가득, 계장님은 절반, 팀장님은 삼분의 1만. 나중에는 알아서 기호별로 커피를 대령했다. 커피도 직장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어느새 나도 커피양이 늘어갔다. 커피 한잔 마셔야 일의 능률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특히 오후에 잠이 스멀스멀 찾아올 때면 나도 모르게 발길은 탕비실로 향한다. 구수한 커피 냄새가 코 끝에 닿아 나를 무의식에서 의식의 세계로 인도했다.
점차 나의 커피 세계관도 확장되었다. 사무실 믹스 커피에서 머물다 커피 전문점의 고급진 커피로 눈길을 돌렸다. 이곳은 메뉴부터 신선했다. 에스프레소, 캐러멜 마키아토, 카페 모카 등 발음도 어려웠다. 맛은 어떠한가. 단맛을 넘어 달콤쌉싸라함이 입안에 가득 찼다. 이런 맛도 있었구나. 나는 여태껏 커피 유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점심 먹고 난 후 동료들과 으레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이젠 나만의 기호도 생겼다. 카페라테 안에 시나몬 가루를 가득 넣어 마시면 '행복'이란 단어가 마음에 새겨졌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거의 한 끼에 근접한 커피 값이었다. 이젠 선배보다 후배가 많아진 회사에서 함께 커피 전문점에 가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눈치 보며 무조건 아메리카노를 외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각자의 취향이 뚜렷하다. 순식간에 1~2만 원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간다고 하면 무시 못할 금액이었다. 그렇다고 안 간다고 할 수 없고. 이미 혀란 녀석도 믹스 커피를 밀어냈다. 이런 간교한 놈 같으니라고. 네가 언제 그 맛을 알았다고!!
그 고민은 어느 순간 풀렸다. 2년 전부터 하루 1식을 시작했다. 업무 특성상 종일 앉아 있는데, 3식을 다하기 부담스러웠다. 아침은 간단히 선식으로 때우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만 먹었다. 잔업을 하면 회사에서 밥 값이 나왔다. 점심을 안 먹으니 식후땡 커피 마실 기회도 줄었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다. 커피 마시는 시간도 오후로 바뀌었다. 사내 커피 전문점은 천 원정도 가격도 저렴했다. 혼자 가기 뭐해서 주로 후배들을 대동해서 갔다. 넉넉한 마음은 필수 탑재였다. 그러나,
"신계장님. 오늘은 달달한 게 당기는데, 바닐라라테도 괜찮죠?"
"저는 아까 커피를 마셔서 시원한 생과일주스 먹을래요."
"에스프레소에 얼음 가득이요."
이런 선배를 생각하는 기특한 마음의 소유자들 같으니라고.
"그.... 그래. 당연하지."
나는 시나몬 가루를 듬뿍 넣은 라테를 마시며 생각했다.
나이 40이 훌쩍 넘어도 커피값 생각하는 가련한 인생이여. 50이 넘으면 이런 걱정 없이 팍팍 마실 날이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