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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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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Nov 15. 2021

도서관은 추억의 때가 잔뜩 묻은 장신구 같아.

도서관 말 만으로도 마음이 몽글해

그런 날이었다. 내내 몸이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 마냥 무겁고 무기력했다. 오늘은 반드시 책을 읽으리라 호기롭게 펼쳤으나 폭포수 같은 잠이 쏟아지며 침대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아내가 읽을 책이 있다며 도서관에 간다고 했다. 도서관? 가고 싶다. 혹여나 두고 갈까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들은 집에서 쉬겠다고 했다. 가방 속에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 노트, 펜, 이어폰, 충전기를 챙겼다.


날이 풀렸다더니 가을바람이 이마를 간지렀다. 아내 손이 비었길래 덥석 잡았다. "자기 추울까 봐 그래." 라며 능청을 떨었더니 빼려고 하기에 주머니 속에 쏙 넣어버렸다. 어딜!


도서관을 가려면 백화점을 지나가야 했다. 요즘 기획전을 한다더니 옷, 신발, 장신구, 락앤락, 심지어 만두까지 팔았다.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고 신호등을 건너 또 한참을 가니 드디어 도서관이 나타났다. 그냥 보았을 뿐인데 왜 이리 마음이 몽글하지.

도서관은 손때가 잔뜩 묻은 장신구처럼 추억이 가득 서려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동네 도서관에 다녔다. 동네라고 하기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주말이면 새벽까지 가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간신히 들어가면 4층으로 뛰어올라가 얼른 빈자리를 찾아 가방을 놓았다. 그리곤 2층 열람실로 내려가 신문도 보고, 소설책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면 어느새 친구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모임 김에 잠시 밖에 나가 수다 떨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라면에 김밥을 잔뜩 먹었다.


이제는 공부를 해야지 하며 자리에 앉으면 잠 벌레가 날아와 머리에 앉았다.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자고 일어나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고 옆을 쳐다보면 다들 나처럼 꿈나라를 떠났다. 정신 차리려 휴게실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셨다. 그곳엔 늘 익숙한 아저씨 한 명이 있었다. 늘 파란색 운동복 바지에 후줄근한 흰 티를 입고 있었다. 몇 번 얼굴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다 말까지 텄다. 고시 준비생이었다. 정확히 사수생이었다. 책상엔 두꺼운 책들이 가득했었다. 스스럼없이 인생의 조언까지 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중반이나 되었으려나. 그땐 한참 어른처럼 느껴졌다.


여드름 숭숭 난 꼬꼬마들과 거뭇한 수염의 아저씨 사이에 우정이 싹텄다. 친구 A는 일부러 큰 가방을 챙겨 그 안에 농구공을 가져왔다. 오후의 찌뿌듯함을 벗어내려 우리는 아저씨와 인근 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신나게 농구를 즐겼다. 불룩한 뱃살과 다르게 제법 농구를 했다. 특히 몸싸움으로 우리를 압도했다. 땀벅벅이 된 채 스탠드에 앉아 쉬고 있으면 어느덧 하늘이 어둑해졌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자리만 맡아놓고 내내 놀러 다니는 우리에게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땀냄새 풀풀 풍기며 그제야 책을 꺼내 끄적거렸다. 기껏해야 두 시간 정도 공부를 했으려나. 생각해보면 도서관은 공부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답답한 현실을 도망가고픈 도피처였다. 캄캄한 길을 작은 가로등에 의지하며 돌아오며 한 것도 없이 뿌듯했다.


추억 속에 헤어 나와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책을 찾으러 떠났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책 속에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럴 때가 참 좋다. 처음엔 와닿지 않은 작가의 문장이 점차 이해되며 몰입되는 순간. 그 쾌감을 원 없이 맛보던 중 문득 읽고 싶었던 소설이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문학 코너에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없길래 사서분께 물어보니 가장 안쪽에 있다고 했다.

낡은 책장 사이로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온갖 종류의 책에서 나오는 고유한 냄새가 합쳐져 독특한 향을 뿜어냈다. 오래된 도서관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손에 쥔 종이 안에 적힌 808. O. 956이란 숫자를 따라 배회하다 책을 찾았다. 자리에 돌아가 보니 아내도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가져온 책을 한편에 밀어놓고, 읽던 책으로 돌아갔다. 이제 거의 다 읽었을 무렵 맞은편에 있던 아내가 이제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왔던 길을 돌아가며 가끔 이렇게 도서관에 오는 것은 어떠냐고 아내에게 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 좋아라. 이 핑계로 도서관 데이트도 하고 책도 읽으면 일석이조겠지.


찬바람이 훅하고 불어오는 순간 아내는 고개를 숙이며 불쑥 내 오른팔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한참이고 앞으로 나갔다. 그냥 그렇게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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