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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Oct 23. 2023

아내는 여행을 떠나고, 우리는 독서모임을 한다

넷이 아니어도 좋아

아내가 1박 2일로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큰일 났다. 당장 애들 밥부터 걱정이었다. 하필 오늘은 찬양제가 있어 오후 늦게나 되어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모두 마치고 뒤늦게 전화했더니 아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자장 양념에 밥을 잘 챙겨 먹고 아들은 스카에 시험공부하러, 딸은 집에서 숙제를 하고 있단다.

거의 저녁 무렵이 다 되어 집에 와 딸물건을 사러 인근 마트에 갔다. 돌아오는 길 무얼 저녁으로 먹을까 고민하다가 '치킨'이 떠올랐다. 아들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좋단다. 오케이 저녁 해결. 저녁을 챙겨 먹고 서둘러 청소, 설거지, 빨래 삼종 세트를 마무리했다. 내가 이리 급한 건 바로 '가족 독서모임'때문이었다.


지난 금요일, 아들은 나를 불렀다.


"아빠, 이번주 일요일에 독서모임 하자."

"오케이. 알았어!"


이런 대견한 녀석 같으니라고. 요즘 아이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야기를 나누면 생각의 깊이가 전과 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두렵기까지 했다. 이러다 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는 건 아닐까. 아니 이미 넘었는지도.


그리곤 마딱들이는 딜레마. 아들은 개별 도서를 원하고 딸은 공통 도서를 원한다. 그래도 지난번 도서관에서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골랐기에 이번에 공통 도서를 하기로 했다. 내가 가져온 책은 '내 이름은 윤이에요'였다.

저녁 7시 반 우리는 테이블에 모여 가을가을 한 날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소리 내어 한 장씩 읽었다.


줄거리  

1. 책 소개

- 이 그림책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 썼다. 작가의 며느리가 이민 2세로 이름인 '윤'이었다. 며느리를 통해서 한국에 관해서 알게 되었고, 고집 세면서도 귀여운 아이에 관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2. 줄거리

- 고향인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윤이에게 아빠는 영어로 이름 쓰는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아빠는 당연한 행동을 한 것인데 윤이는 영 마땅치가 않는다. 왜냐하면 윤이는 자신의 한국이름이 예뻤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한 선생님이 YOON이라고 적힌 시험지를 주면서 따라 써보라고 시킨다. 그런데 윤이는 영어이름을 쓰지는 않고 엉뚱하게 온통 CAT 이라고만 써서 낸다. 그다음 날도 선생님은 똑같은 글씨연습을 시키지만 이번엔 빈 줄마다 BIRD라고 써서 낸다. 그다음 날도 같은 일의 반복되고 이번엔 컵케이트라고 적는다. 아마도 낯선 환경에서 어딘가 숨고 싶은 마음, 그리고 한국으로 가고픈 소심한 반항의 표현이었다.


둘째 날, 윤이는 고향이 그립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친구들과 선생님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던데 때, 백인 친구 중 하나가 윤이에게 컵케이크 하나를 건네준다. 그리곤 둘이 마주 보며 킥킥 웃는다. 기다려주는 친절한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마음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윤이는 집에 돌아와서 엄마 아빠에게 오늘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영어로 불러준다.


다음 날 학교에 간 윤이는 빨리 글씨를 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엔 과연 뭐라고 썼을까?


질문거리

1. 아빠의 질문

"내가 만약 윤이처럼 갑자기 이민을 가게 된다면 어떨 것 같나?"


 : 나도 그림책에서의 윤이처럼 힘들었을 것 같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친구들도 새롭고 낯서니깐. 분명 나는 계속해서 아빠나 엄마에게 한국에 돌아가자고 애원하고 떼를 썼을 것 같다. 그래서 책을 보며 궁금해졌다. 윤이가 점차 적응해서 다행이기는 하나 앞으로 윤이가 적응해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아들 : 잘 지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윤이처럼 좋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면 적응해서 잘 지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에 어떤 프로그램에서 이민 간 한국 학생이 대학에서 총기 난사를 한 사건을 본 적이 있다. 너무 끔찍하면서도 그 사람이 어릴 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했는데, 인종차별 등 여러 어려움이 쌓여 그런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쉽사리 어떨 것 같은지 말하기 어렵다.


(이야기는 잠시 우리의 아픈 과거인 입양의 역사로 흘렀다. 고아들이 외국으로 나가 피부색도 문화도 다른 낯선 외국땅에 입양되어 살게 된 아픈 사실들이었다. 사실 그 이면에 돈이 있었고, 이를 통해 국가가 외화를 벌여드린 수단이 되었다는 점을 아이들과 나누었다.)


2. 아들의 질문

"윤이가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우선 책에서 처럼 좋은 선생님과 친구가 있어야 한다. 특히 친구가 중요하다. 단짝 친구가 생기면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를 할 수 있고, 모르는 것도 물어보며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생활을 많이 할 테니 선생님의 역할도 중요하다. 말을 잘 못한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면 윤이도 힘을 얻고 적응할 것이다.


아빠 : 영어를 빨리 배우는 점이 중요할 듯싶다. 일단 말이 통해야 자기표현도 할 수 있고, 자신감도 생긴다. 다행히 그림책 말미에 윤이가 영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와서 안심했다. 윤이는 아직 어리기에 금방 언어를 깨우칠 듯싶다. 그리고 가족들 도움도 필요하다. 엄마, 아빠도 바쁘겠지만 세심하게 윤아를 챙기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수시로 살펴야 한다. 급박한 환경 변화 앞에선 마음이 심하게 아플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딸의 질문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아빠 

윤이 마음이 오롯이 담긴 장면이었다. 얼마나 한국에 가고 싶었으면 새가 되고 싶다고 했을까. 짧은 문장이었지만 정말 슬펐다.


아들

윤이가 영어로 자기 이름을 썼다는 건 이제 미국에서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의지를 표현한 듯 보여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영어임에도 한국의 뜻을 그대로 간직한다고 해서 윤아가 그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듯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소감

아빠 : 먼저 독서모임을 아들이 먼저 하자고 해서 무척 뿌듯했다. 책을 읽고 함께 생각을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들 : 오늘 책을 읽으며 긴 내용이 아님에도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독서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솔직히 예전엔 왜 책을 읽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요즘 책을 읽으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장면을 상상하고 떠올리며 생각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번 모임도 그런 시간이 되었다.


딸 : 함께 책을 읽으며 이야기 나누어서 좋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책이 흥미롭지는 않았다. 다음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골라서 독서모임을 하고 싶다.




아내의 빈자리를 가족 독서모임으로 잘 메웠다. 무엇보다 책의 재미에 푹 빠진 아들의 변화가 놀라웠다. 아내가 얼마 전 학교에서 담임선생님 면담을 했는데, 학교에서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했단다. 그런 모습이 독서모임에서도 잘 나타났다. 독서가 생각을 넓히고, 깊게 만든다는 말에 소름 쫙. 이대로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딸이 좋아할 줄 알고 골랐던 책이 흥미롭지 않았다니. 늘 예상은 벗어나기 마련이다. 다음번엔 딸이 고른 책으로 꼭 독서모임을 해야겠다.


가을은 역시 책의 계절, 독서모임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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