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둘째 방이 굳게 닫혔다. 그뿐 아니라 나에게 수시로 날 선 감정을 드러냈다. 물론 사춘기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다. 그런 감정이 쌓이고 쌓여 일상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바쁘다는 핑계로 모른 척 한쪽 구석에 방치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지난주 둘째에게 면담 요청을 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찮다는 듯 밀어냈지만 끝까지 버텼고 마침내 방문이 열렸다. 내 안에 정답을 이미 정해놓고, 말하면 듣겠다는 식의 모순을 던져버리고 오롯이 들었다.
아이는 무너진 댐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불만을 토로했다. 찬찬히 들어보니 그 안에 숨겨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나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달라는 무언의 항의였다. 아빠는 엄마랑 오빠만 좋아한다는 말에 놀랐다. 내가 그랬던가. '관심'이란 단어는 잘해서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행동해서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둘째는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노력하기로 했다. 둘이서만 가족 독서모임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산책을 꼭 가기로 했다. 자주 부딪쳐야 할 말도 더 생기는 법이니. 그 뒤로 의도적으로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둘째에게 말을 걸고, 관심을 보였다. 그랬더니 금세 닫힌 문이 열리고, 전에 보였던 환한 미소가 찾아왔다.
그리고 아이가 원한 둘만의 독서모임을 위해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골랐다. 둘이서 같이 읽고 나누고 싶다고 해서 고심하다가 드디어 우리에게 딱 맞는 책을 골랐다. 바로 '아빠는 아홉 살'이란 동화책이었다.
일요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둘이서 테이블에 모였다. 70page정도 되는 책을 돌아가면서 큰소리로 읽었다.
줄거리
평소에 한없이 다정한 예은이의 아빠는 갑작스레 분노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다. 그럴 땐 가족 모두가 당황을 한다. 그러던 중 예은이는 아홉 살이 된 아빠의 학창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아빠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순간을 마주한다. 아빠는 서른아홉이 된 시점에 병원 진료를 통하여 본인이 ADHD임을 진단받는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아빠의 고백을 통해서 가족 모두가 새로운 전환점 맞이하는데....
질문거리
1. 아빠의 질문 : 아빠가 만약 ADHD 진단을 받는다면?
- (딸) : 물론 처음엔 당황스럽겠지만 결국엔 아빠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 같다. 아빠도 내가 그랬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이니깐.
- (아빠) : 만약 딸이 그랬다면 솔직히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주의집중을 잘 못하고 산만하니 처음엔 혼도 많이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병이라 알게 된다면 나 역시도 그런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 같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치료 기관도 알아볼 것이다.
2. 딸의 질문 :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 (아빠) : 아빠의 ADHD 진단 이후 예은이가 보낸 편지. 만약 내가 이 편지를 받았다면 방에 들어가서 펑펑 울었을 것 같다. 딸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였다.
-(딸) : 전학 온 아홉 살 아빠에게 주변 아이들이 머리에 풀을 묻히는 장면이다. 얼마나 화가 나고 속상했을까. 만약 내가 옆에 있었다면 걔네들 전부를 혼내 주었을 것이다. 아빠가 화를 많이 내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3. 아빠의 질문 : 각자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 (딸) : 솔직히 요즘엔 크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나도 학원 가느라 바쁘고, 아빠도 회사일로 많이 바쁘니. 어릴 땐 아빠랑 둘이서 어린이 집 체험도 가고, 주말엔 산책도 많이 하곤 했는데. 우리에겐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빠는 어떨 땐 아이 같다. 감정 표현이 잘 드러난다. 기쁘면 웃고, 기분 나쁘면 가라앉고. 그래도 재밌는 면도 많고 좋다.(수습인 거니??^^)
- (아빠) : 어릴 때 기억 속 아빠는 무서웠다. 말도 별로 없었고,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어색했다. 그러다가 술을 드시고 오시면 유도선수였던 특기를 살려 나를 공중에서 날아다니게 만들었다. 늘 무서워 옷장 속에 숨기도 했는데 금방 찾아냈다. 이제는 그런 행동이 아빠 나름의 애정표현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4. 딸의 질문 : 책을 읽은 소감은?
- (아빠) : 아빠의 힘듦, 그걸 이해하려 노력하는 가족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뭉클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놀랐고, 가족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것 같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족함을 채워주고 함께 가는 것. 이 가족의 앞으로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 (딸) : 우선 오래간만에 아빠와 둘이서 독서모임을 해서 좋았다. 아빠가 골라온 책 내용이 참 좋았다. 아빠에 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엔 길다 생각했는데 한 장씩 소리 내어 읽었더니 금세 끝이었다. 그래서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책을 미리 읽어오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함께 읽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아빠와 딸과의 관계에 관한 책을 고르려 했는데 초점이 아빠로만 향한 듯해서 미안했다. 그래도 넓은 의미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니 괜찮겠지. 다음번엔 딸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찾아보아야겠다.
가족 독서모임을 통해서 딸이 나와 함께 하고픈 마음이 많다는 걸 깨닫고 조만간 둘이서만 롯데월드에 가기로 했다. 놀이기구 타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에게 큰 선물이 되겠지. 10개 이상을 타겠다는 각오에 벌써부터 멀미가 밀려왔지만 까짓것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독서모임을 마치고 곧장 인생 네 컷을 찍으러 향했다. 둘째의 지시하에 예쁜 사진을 찍었다. 사무실에 고이 모셔두어야지.
관계는 항상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그 디딤돌이 가족 독서모임이 되어 기쁘다. 앞으로도 책을 통해 서로를 더욱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