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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Feb 20. 2024

고백

어릴 때 어머닌 아비 없는 자식이란 소릴 듣기 싫다 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아비는 단지 먼 지방에 있었을 뿐 없진 않았다. 거대한 보호막을 나와 누나 안에 씌우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옆에 딱 붙어있지도 않았으면서.


난 그 나이 때 갖는 밖으로의 갈망을 책 속에 빠져들며 풀었다. 책 안엔 펄떡대는 심장을 잦아들게 할 묘약이 있었다. 그렇게 공상과 상상을 오가면서도 몹시 외로웠다. 시간이 흐르고 겉으로 나이만 먹었지 어른아이는 굳게 자리 잡아 내적 성장을 가로막았다.


20대가 되어 성인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여전히 속이 텅 빈 껍데기였다. 몇 번의 연애를 거쳤지만 내가 미성숙했기에 그저 외로움에 기댈 존재가 필요했기에 그건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났다. 오롯이 내가 끌린 건 그녀의 밝은 빛이었다. 우리는 매일 만났고, 그녀와 함께라면 나의 불완전함은 모두 채우리라 기대했다. 우리 사이의 거대한 장벽이었던 ‘종교’도 문제 되지 않았다. 그래. 앞으로. 앞으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앞뒤 좌우 볼 것 없이 결혼이란 종착역을 향해 계속 달려 나갔다.


‘결혼 생활이라는 이 험난한 바다를 향해 할 수 있는 나침반은 아직 미발견이다.’란 어느 유명한 작가의 말처럼 발을 내딛자마자 주변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결혼은 둘이 아닌 넷이요, 넷도 아닌 여섯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를 가둔 거대한 보호막을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비겁하게 시간에 기대 어찌어찌 되겠다는 얄팍한 요행만 바랐다.


어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더란 말인가.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어느 순간 이러단 안 되겠다 싶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와 평생을 약속한 사람이잖아. 이건 당연한 결정이야.’라며 안위를 해보았지만, 그 오랜 시간 옥죈 사슬을 끊는다는 건 살을 도려내는 것 이상으로 아팠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를 보호하고 숨 쉬듯 익숙한 옷이었기에.


결혼은 청평호에 머물던 내가 바이칼호까지 확장한 말 그대로 천지개벽할 사건이었다. 쪽팔리지만 나이 서른이 다되어 겨우 독립을 시작했다. 누구보다 훌륭한 조력자는 바로 아내였다. 그녀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나와 달리 K 장녀로서 이미 예전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살았다,


그게 의도였든 아니었든지 간에 그녀는 계속 나를 세상 밖으로 이끌었다. 해야 해. 할 수 있어. 내 도움은 여기까지야.”라며 당근보단 채찍을 휘둘렀다. 솔직히 처음엔 서운했다. 아니 배신감마저 들었다. 우리는 하나라 여겼건만 둘이라 하니. 돌이켜 보면 무작정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온통 세상의 중심이 나에게로 쏠린 이기적인 마음을 상대방에게도 향하도록 했다. 내 말이 우선이 아닌 너의 말을 듣게 했다. 내 입만 우선을 아이들 먼저로 만들었다. 그저 할 줄 요리라곤 물이 한강인 라면밖에 없었는데, 몇 끼 정도는 너끈히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많이 흔들리고, 우유부단하고, 자기중심적이지만 이렇게 치부를 드러낼 만큼 전과는 달라졌다. 네가 없어도 충분히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때론 같이하며 더욱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알아가는 중이다. 아직 갈 길 멀지만, 결혼이 아내가 그리고 아이들이 변화의 중심이다. 부족하고 못난 나라는 건 성숙하고 나아질 여지가 남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깐.


얼마 전 아내와 갈등의 상한선에서 술 한잔 하며 허심탄회하게 대화했다. 아내의 입에서 나온 나는 여전히 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듣고 또 내가 서운한 점도 말하며 곪은 상처를 보듬었다. 우리의 주된 갈등의 요인인 아이의 교육 문제에 관해서 그 차이를 좁힐 순 없지만 적어도 서로의 영역은 지키기로 했다.


더불어 둘이 할 수 있는 일들도 찾아 실천해 보기로 했다. 하나는 성경 공부, 다른 하나는 격월로 식사든, 운동이든, 영화관람이든 각자 원하는 것 하나씩 하기. 이제는 하나도, 때론 둘도 될 수 있음을 마음으로 이해한다.


인생의 반절 가까이 미성숙하게 살았으니, 나머지 반절은 좀 더 성숙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 목표에 온전히 다다를 수 없겠지만 거북이걸음이라도 그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간다면 근처라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한 줄 요약 : '성숙'은 스스로 깰 용기가 있는 자 만이 쟁취할 수 있는 특권이다.




이 글은 온라인 매일글쓰기 뉴스레터로 발행한 글입니다.




#라라크루, #라라크루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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