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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Aug 28. 2024

러닝머신 30분의 미학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든다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마음 왼 편엔 천사의 목소리가 오른편엔 악마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어제 잠도 잘 못 자고 피곤했잖아 오늘 하루만 쉬자.', '아니야. 너와의 약속은 지켜야지. 자꾸 꾀 불릴래.'

좌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집에 다다라서까지 계속된다. 한참을 서성대다가 결국 발길은 그곳으로 향한다. 매번 이럴 거면서 고민은 왜 하는 건지.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또다시 번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고, 매트 위에서 몸을 푼다. 어쩔 수 없는 사무직의 슬픔이랄까. 뒷 산만큼 우뚝 솟은 어깨를 봉으로 풀면 고통과 병행한 묘한 쾌감이 찾아온다. 누가 감성변태 아니랄까 봐.  이윽고 까맣고 커다란 녀석 앞에 서서 잠시 노려본다. 전투를 앞둔 기마대의 비장함이 주변 가득 흐른다. 내 기필코 오늘은 너를 정복하고 마리라 막 이러면서.


드디어 길다린 직각 위에 발을 뻗는다. 왼쪽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 달리기 기능을 켜고, 오른손을 뻗어 천천히 숫자를 올린다. 1,2,3,4..... 9. 덜컹거리는 발판의 울림에 따라 내 발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쉴 새 없이 발걸음이 교차하며 분명 눈은 거치대에 올려놓은 핸드폰 사이로 보이는 OTT 드라마를 바라보지만 정신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향한다.


'오늘은 컨디션이 영 아닌데. 그냥 1km만 뛰다 나머진 걷자. 응?'

'무슨 소리. 4km는 뛰기로 나랑 약속했잖아. 정신 차려!'


또다시 좌우에서 속삭임이 시작된다. 결단은 못 내리고 애꿎은 시계만 바라본다. 늘 2km까지가 고비다. 뇌와 분리된 채 양발은 점차 속도를 낸다. 숨은 가슴팍까지 차오른다. '헉헉' 노린내 나는 비명이 절로 나온다.


"구간기록 2. 구간페이스는 6분 15초"


이어폰 속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에 드디어 마의 구간을 지났음을 인지한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진다. 특히 방울이 눈 속으로 들어가 몹시 따까웠다. 이때부턴 욕심이 생긴다. 다시 오른팔을 뻗어 속도를 10까지 올린다. 고통은 고통 속에 사라진다는 말처럼 쿵쾅거리는 몸과 달리 마음은 고요 속에 접어든다. 내 몸속 작은 솜털 하나까지 달리는 행위에 집중한다.

무아지경 속 3km 구간을 지나 4km로 향하는 길은 고통은 사그라들고 그 자리는 하늘을 나는듯한 기분에 취한다. 일명 '러너스 하이'라고 달리며 느끼는 행복감이란다. 내려오기 싫어 더 달리고픈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걸으며 마무리한다. 대략 30분이 넘는 시간이다. 연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와의 약속을 지켰단 안도감, 뿌듯함을 느낀다. 탈의실에 들어가 샤워기로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뜨거운 열기를 식힌다.


작년 말부터 나잇살이 급격히 찌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얼굴 좋아 보인다란 말이 편하구나로 치환되어 은근 신경을 긁었다. 걸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었다. 음식마다 들어간 재료에 상관없이 그렇게나 맛날 수 없었다.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고무줄이 달린 바지가 아니었다면 출근도 힘들었으리라. 점차 늘어나는 뱃살은 인격이 아니라 모독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단 마음을 그저 품고만 지냈다.


늘 상 지나치던 동네 헬스장에 걸린 문구가 그날따라 크게 다가왔다. '헬스복 포함 월 4만 원. 이번달 말까지만 혜택' 일 년 365일 걸린 홍보일지 모르겠지만 뭐에 이끌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그렇듯. 세상의 좋은 온갖 말로 꼬시는 PT와 넓고 쾌적한 관물대의 유혹을 버텨내고 오롯이 헬스만 계약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나와의 약속을 했다. 최소한 주 5회 이상은 가서 뛰자. 물론 쉽지 않았다. 급하게 찾아온 출장, 명절, 음주가 동반한 회식 등등. 정 안되면 휴가지 숙소에 있는 헬스장에 가거나 밖에 나가서 뛰었다.


벌써 운동한 지 8개월 차가 다 되었다. 몸무게는 5kg 감량했다. 운동에 비해 눈에 띄는 결과는 아니지만 특별한 식단 조절 없이 빠졌으니 만족스럽다. 맞지 않아서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옷을 하나 둘 꺼내 입었다. 이제는 고무줄에 의지 않고 살짝 타이트한 바지도 소화 가능다.


체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저녁까지 숙취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도 조금 머리가 아플 뿐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거뜬다. 예전에 선배들이 술 먹으러 그렇게 운동하더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삶의 활력이 넘치니 모든 부분에 긍정적이다.


전에는 집에 가면 피곤해서 퍼지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시 가벼워진 엉덩이 지런히 움직이며 청소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개키며 집안일에 극적이다. 무엇보다 긍정에너지가 가족들에게로 향해 밝은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여전하지만 전처럼 쌓아 두지 않고 퇴근하고 러닝머신 위에 올라 털어내려 노력한다. 뛰면서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주변에서도 몸의 변화뿐 아니라 한결 밝아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주말엔 글 쓰고 책 읽는 힘 얻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이젠 가만있지 않는다. 에코백안에 패드와 책을 챙겨 카페로 가서 치는 에너지를 글과 책에 아낸다.

고작 러닝머신 30분 뛰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어느 명언처럼 소한 일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엔  힘이 된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도 러닝머신 30분은 꾸준히 이어나갈 예정이다. 마치  쉬 듯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내면화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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