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말'들과 뒤섞여 살고 있다. 어렸을 땐 부모의 말이 법처럼 반드시 따라야 했고, 조금 커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말이 내 삶에 커다랗게 다가왔다.
처음엔 말이 수학공식처럼 '1+1=2'라고 딱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숱한 경험 속에 '3'이 될 수도 '4'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말속에 담긴 진위를 파악하고, 적당히 드러내고 때론 숨기면서 밀당을 하기도 한다.
살면서 가장 간절한 '말'을 꼽으라면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서 했던 감언이설이 아닐까. 그때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기에, 이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기를 쓰고 세상의 온갖 좋은 말들은 다 꺼내 놓았다."결혼하면 항상 행복하게 해 줄게.",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라도 다 할게.", "너 없으면 나란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러니 결혼해 줘." 등등. 어떻게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내 코가 피노키오 코였다면 아마도 10m 이상은 늘어나 부러져버렸을 거다. 그 말들이 결정적 역할을 해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살면서 아내가 나로 인해 열받을 때마다 그 허언들을 떠올리며 얼마나 후회를 반복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못 하겠다.
그간 수많이 말들이 나를 스쳐갔지만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대학교 3학년이 저물어갈 무렵, 한창 진로 문제로 고민 속에 파묻혀 지냈다. 남들처럼 졸업 후 취업을 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만 머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날도 좁디좁은 사각의 도서관 자리에 앉아 책을 펴 놓고 멍 때리고 있었다. 그때 곧 졸업을 앞둔 4학년 선배가 지나가다 나를 툭치며 말했다.
"잠깐 바람도 쐴 겸 커피 한잔 할까."
"좋죠."
평소에도 친하게 지낸 선배와 자판기 커피를 들고, 도서관에서 가장 높은 옥상에 올라 붉은빛이 푸른 하늘을 잠식하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실배야 내가 보기에 너는 상담을 공부하면 좋겠어. 너에게 잘 맞고 또 요즘 유망하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상이 멈추고 짜릿한 전율이 허리부터 목 뒤편까지 타고 흘렀다. '상담'이란 두 단어가 그렇게 매력적이었다니. 선배와 헤어지고 다시 도서관에 돌아와서도 계속 귓속에서 단어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다. 아는 후배가 함께 요가를 배우는 수강생 중 상담을 전공하는 분이 있다고 해서 다짜고짜 요가원을 찾아갔다.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분을 만나 상담을 받았다. 나에게 청강을 권했다. 직접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과 청강을 들어야 하는 곳까진 1시 간 반이 걸렸다. 낮에 대학 수업이 끝나고 곧바로 대학원으로 향하여 야간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듣기 전 교수님께 사전 허락을 받았고, 한 번도 빠짐없이 듣는 모습이 대견했는지 나중엔 출석도 부르고, 과제도 내주셨다.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다 되었다. 공강시간엔 도서관에 가서 심리학 공부에 매진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는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단 것이다. 수업은 흥미로웠고 공부는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 했다면 원하던 대학에 여유롭게 갈 수 있었을 텐데.
목표했던 상담 대학원은 들어가기 어렵기로 유명했다. 스터디까지 해서 대학 졸업 후 다행히진학하게 되었다. 합격 소식을 듣고 나서 찾아온 기쁨과 환희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대학원 시절엔 공부도 공부지만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상담 전문가에게 분석도 받고, 직접 상담실습과 심리검사를 활용해보기도 했다. 배울수록 이 길을 잘 선택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비슷한 길을 가는 결이 같은 사람들과의 교류도 큰 힘이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청소년상담센터에 곧바로 취업했다. 학교폭력 피해를 당한 친구들을 상담하는 업무를 맡았고, 일선 학교에 학교폭력 예방교육 강의를 시작했다. 일은 보람이 있었다. 상담실 안에서 내담자의 말에 집중하며 그들을 돕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을 평생 할 것 같았는데, 운명처럼 법을 어긴 이를 만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범죄 기록만으론 천하의 나쁜 사람들이지만 처음부터 그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그들 삶에 한걸음 다가설수록 도움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의 죄는 반드시 엄한 처벌이뒤따라야 한다. 다만 다시는 범죄에 연루되지 않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 역시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얼마전 정해진 기간이 끝나고 마지막 면담을 마친 친구가 갑자기 한 번 안아 보아도 되냐며 다가왔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나도 꼭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한 달에 두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1년 넘는 시간 동안 그 사람의 변화되려는 피나는 노력과 실제 달라진 모습을 보아왔다. 본인의 잘못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말하는 걸 주는 말을 하나라도 더 받아들이려는 마음에 나 역시 온 힘을 다하게 되었다.
다 큰 성인남자 둘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한참을 복도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좋은 길로 나아가길 바랐다.
어쩌면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지 모른다. 그동안 수없이 좌절하고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20년도 훨씬 전에 선배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 한마디가 지금 내 삶을 이끌었다. '말'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 새삼 깨닫게 된다. 말의 무게를 느끼곤 신중해지려 하지만 늘 어렵다. 갈수록 말을 듣기보단 내 말하기 바쁘다. '말을 경계해야 하자. 꼭 필요한 말만 하자. 나쁜 말을 피하고 좋은 말을 하려 노력하자.'
나의 말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마디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다. 말 한마디로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