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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Sep 11. 2024

20년 차 내향인 강사입니다

강의를 통해 사람 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탁자 위에 놓은 마이크를 집는다. 오른손에 굳은 결기를 담아 한번 꽉 쥐어본다. 고개를 든다. 내 앞에 나를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희미한 빛이 되어 흔들거린다. 긴장이 발끝부터 손끝까지 전해져 찌릿하다. 첫마디가 중요하다. 이럴 땐 내 안 저 어딘가에 은박지로 꽁꽁 싸매어 놓은 '끼'가 꿈틀대며 세상 밖으로 고개를 한없이 쳐든다. 내 입에서 나간 말이 보이는 이들 얼굴에 활짝 웃음꽃을 피웠을 때 그제야 안도를 한다.


그때부턴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자로 된 듯 강의장을 마음껏 연주한다. 내가 이끄는 데로 청중은 저 뜨거운 사하라 사막에도 갔다가, 이제 곧 얼음이라도 될 것 같은 남극을 마주한다. 시간은 무의미하다. 언제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저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귀에 들리는 뜨거운 박수와 함성소리로 끝이 났음을 인지한다.


마지막 절정을 치달았을 때 느껴지는 황홀감 때문에 여태껏 강의를 놓지 못하고 있다. 돌아오는 길은 본연의 모습인 내향인이 되어 홀로 사색하며 빠져나간 기운을 보충한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날 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힘없는 중년의 아재만 남을 뿐이다.


며칠 전 사무실 자리에 앉아 달력에 새롭게 일정을 추가하던 중 주말마다 빼곡히 채워진 강의 일정에 나도 모르게 '휴'하는 한숨을 지었다. 강동도서관에서 3주간 줌으로 진행하는 독서모임 피드백 강의를 시작으로 원주 그림책 도서관에서 2회에 걸친 가족 독서모임 강의를 거쳐 도봉 기적의 도서관에서의 특강으로 한 달간의 여정이 끝이 난다. 9월은 정말 주말에도 쉼 없이 달려야 한다. 런 일정이 올해 내내 이어질 전망이다.

벌써 강의를 해온 지 20여 년이 다 되었음에도 시작 전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걸 보면 타고난 강사는 아니다. MBTI를 신봉하진 않지만 'ISFJ'란 유형은 남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걸 썩 즐겨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예전만 해도 외향성인 'E'와 내향성인 'I'의 점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서 때론 어느 자리에선 외향인의 가면을 쓰고 주도적으로 나서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연한 내향인이다.


수많은 자리 중 구석에 앉아야 심리적 안정감이 생기고, 내가 떠들기보다는 듣는 것이 편하다. 낯선 자리에서도 자기표현을 잘하고, 거침없는 사람을 보면 머릿속엔 '부럽다', '대단하다'가 자동적으로 떠오르지만 실행할 순 없기에 그저 바라만 본다. 갈수록 내향성이 짙어져 가장 힐링되는 시간이 홀로 카페에 가서 글 쓰고 책 읽는 시간이다. 운동도 헬스장에 혼자 가서 역기 들고 러닝머신 위도 뛰며 오롯이 나에게 집중한다.


가면을 쓴 채 밝고, 활발한 척했던 젊은 날의 그 시절이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했을지 이제야 깨닫는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부끄러움도 많고 수줍음 덩어리였다. 특히 발표할 때만 되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땀은 비 오듯 흘렀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평소 장난도 많이 치고 활발해 보였던 내가 이렇게 홍당무가 되는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었다. 그게 신경이 쓰여 더욱 움츠려 들게 되었다. 그때부터 어떻게든 발표는 피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강의는 숙명과도 같았다. 성인이 되어 처음 취업을 했을 때부터 자연스레 강의를 하게 되었다. 첫 근무지가 청소년상담센터인데 일선 학교에 가서 재학생 대상 학교폭력예방교육과 더불어 부모와 교직원 대상 교육도 실시하였다. 이상하게도 여러 사람 중 강의 업무가 계속 주어졌다. 이직하고 현재 직장에 들어와서는 더는 강의를 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강의업무가 주어졌고, 강의 대회까지 나가서 덜컥 대상을 수상하면서부터 강의하는 사람이란 이미지가 굳어졌다. 지금은 사내강사로도 활동하며 활발하게 강의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내향인인 내가 이렇게 강의를 하면서 얻는 것이 참 많다. 강의를 하게 되면 굳이 노력할 필요 없이 자연스레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들과 소통하며 삶을 나누다 보면 나의 삶의 지평 또한 덩달아 넓어진다. 아무래도 에너지가 내 안으로 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 안에 머물기 쉬운데 이렇게 다양한 접촉을 통하여 에너지를 발산하게 된다.


강의는 또한 배움의 시간이다. 한 번 강의를 하기 위해선 수많은 자료를 취합하고, 그걸 정리해서 하나의 계획서로 만들고, PPT까지 완성하는 단계단계마다 쉽지 않다. 상당히 창의력이 요구되고, 강의를 듣는 사람에 따라 맞춤형으로 구성해야 하기에 기존의 것을 답습할 수 없고 늘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강의 후엔 내가 한 차원 발전하게 되었음을 느낀다.   


비단 강의 준비에서 뿐 아니라 강의장에서도 배움의 연속이다. 질문을 즐겨하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깊고 심오한 답을 들으면 사고가 확장된다. 그래서 강사란 모르는 걸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걸 꺼내주는 도움자 역할이라 정의 내린다. 강의가 끝나고 인 스스로 답을 다 찾았으면서 많이 배워 고맙다고 말하는 분들을 보면 내가 더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음에 한 움큼 보람을 느낀다.


가끔 내 삶에 강의가 없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는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것 투성이인 사람임에도 강의가 있었기에 조금은 성숙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는 발판을 마련했다.


여전히 난 강의가 떨리고 두려운 내향인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강의를 사랑하고 계속하고픈 열망이 꿈틀댄다. 눈이 허락하는 한 책을 읽고, 손을 움직일 수 있는 한 글 쓰는 삶을 살겠다 다짐했듯이 내 입이 다물어 더는 열리지 않는 순간까지 강의를 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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