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배 Sep 25. 2024

걷기 예찬

걸으며 덜어내고 채우기

낯선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 생겼지. 호기심에 두리번 거린다. 순간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이 딱딱한 아스팔트 양쪽을 알록달록 수놓았다. 고개를 드니 파란 하늘 사이를 움직이는 구름과 그 아래 높낮이가 다른 주택들의 배열이 자아낸 불일치를 이룬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 사진 속에 담아본다. 어느새 이마엔 땀이 송글 맺히고, 등은 서복이 젖었다. 하긴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아래 삼십여분을 걸었으니 그럴 만도. 더위도 잊은 채 그렇게 도시의 풍경 안에 하나가 되었다.


부모님 댁에 전해줄 것이 있어 나왔는데, 버스틀 타면 일곱 정거장이었다. 그냥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곱절이 더 걸리지만 일찍 서둘러 나왔다. 차 장 안에서 편하게 앉아 시원한 에어컨 바람맞으며 가는 호사도 거부하고 굳이 고된 걸음을 택했을까. 그건 말로다 표현 못할 걸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어릴 때부터 빠르게 뛰는 걸 좋아했다. 커서는 뭐든지 빨리빨리 처리하는데 익숙했다. 회사에 입사하고, 성공에 대한 헛된 열망으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일했다. 본사에 발령 나고 이제 고속열차를 탔다는 기분에 도취해 가열하게 앞 만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던 중 가슴을 누가 쥐어짜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이대로 가단 죽을 것 같단 공포가 엄습했다. 눈을 감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진정시키려 홀로 사투를 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래도 걱정할까 봐 차마 연락하진 못했다. 어느새 점심이 되었다. 사무실엔 약속이 있다고 하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회사 뒤편엔 둘레길이 이어진 산이 있었다. 그 길을 무작정 걸었다. 처음엔 복잡한 일들이 계속 떠올라 괴로웠는데, 어느 순간 걷는데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제야 녹색의 푸르름이 눈에 들어오고, 맑은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와 내 몸 구석구석을 정화시켰다. 생각은 걷기 안에 녹아들고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그렇게 1시간을 걷고 돌아오니 사무실 안에서도 틈이 생겼다. 일만 바라보았는데, 나무가, 풀이, 맑은 하늘이, 시원한 바람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점심때 걷기 시작했다. 비가 와도 걸었고, 눈이 와도 걸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밥 먹으러 가자고 묻지도 않았다. 으레 걷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 둘 걷는 동료가 생겼다. 다른 사무실 직원도 찾아와 함께 걸어도 되냐고 물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대화를 그리고 미소를 찾았다. 회사 안에서는 늘 경직된 모습에 딱딱한 사무적인 이야기만 나누던 사람들이 자연 속에 걸으니 그렇게 그리 환하게 빛날 수가 없네.


혼자 걸으면 조용히 사색할 수 있어 좋았고, 같이 걸으면 왁자지껄 끊이지 않는 웃음이 행복했다. 걷다 보니 가는 길도 다양해졌다. 산에 갈 땐 이 길로도 가보고, 저 길로도 가보았다.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은 모험처럼 설레게 만들었다. 인근 공원에 가는 길에 김밥을 사서 경치가 좋은 곳에 나란히 앉아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그곳은 미슐랭 별점 3개를 받은 식당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먹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계절을 누렸던 본사시절 걷기 추억

사계절의 나라에 태어나 그걸 제대로 인지조차 못하고 살았는데, 계절마다 다르게 주는 선물을 걸으며 받았다. 하마터면 이런 절정의 순간들을 서류더미에 파묻혀 잃어버릴 뻔했다. 걷기는 무슨 만병통치약과도 같다. 마음이 심란할 때 걸으면 어느 순간 평온이 찾아왔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 걸으면 밝은 웃음을 되찾았다. 걷기도 중독이다. 하지만 착한 중독이다. 걸으면 걸을수록 행복해지니. 이제라도 걷기를 만난 것에 고마웠다.


걷는 인원은 동호회를 구성할 만큼 불었다. 정식으로 회사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동호회로 결성되었다. 지원금도 받아서 걷기 용품도 사고, 걸을 때 간단히 먹을 간식도 구매했다. 동호회의 철직으로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자였다. 잠깐 왔다 사라지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 안에 잠시나마 걷기 행복이 꽃피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꽃은 향기가 진해서 언젠간 다시 찾게 될 테니깐.


4년여간의 본사 생활을 마치고 작년에 일선기관으로 돌아왔다. 신기하게도 힘들게 일한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고, 걸었던 추억만 남았다. 이제는 점심때 걸을 산도 공원도 없지만, 지금 회사 근처에도 걸을 공간이 있었다. 하긴 어디든 걷지 못할 곳이 있을까. 건강한 다리만 있다면 가는 곳이 길이니깐. 걷기가 습관이 된 후론 어지간한 거리는 차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걸으면 주변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오래 산 동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무엇이 어디에 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애동심(동네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새로운 걸 발견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걸으며 또 내면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상의 골칫거리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니 부쩍 긍정적이게 되었다. 지금 앞에 닥친 심각한 문제들도 걷다 보면 다 지나갈 찰나의 순간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민거리가 생기면 그냥 밖으로 뛰쳐나가 걷기 시작한다. 한결 밝은 내가 되어 돌아온다.


얼마 전 점심때 회사 주변을 걷다가 맨발 걷기가 가능한 황톳길을 발견했다. 곧바로 양말을 벗고 그 길을 따라갔다. 처음엔 맨살이 땅에 닿는 느낌이 어색하고 아프기도 했지만 금세 적응되며 찌릿한 전기가 온몸에 퍼졌다. 맨발로 뛰어다니던 어릴 때 생각도 나고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두 번 왕복하면 대략 30여분이 소요되기에 점심을 얼른 먹고 거거나, 간단한 간식거릴 챙겨 곧장 달려갔다.

걷기 가장 좋은 가을이 찾아왔다. 10월 초엔 퐁당 연휴가 있어서 아내와 아이들을 꼬셔서 춘천 걷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ITX를 타고 남춘천 역에 내려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이후엔 종일 걸으며 이것저것 볼 예정이다. 각자의 삶이 바빠서 대화할 시간이 부족한데 이번에 걸으며 실컷 나눌 예정이다.


이제 걷기는 내 삶의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다. 혹여나 지금 고민을 한가득 짊어지고 끙끙 앓고 있다면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걸어보길 바란다. 다른 것 제쳐두고 걷기에만 몰입하면 돌아올 땐 한결 가벼워진 어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걷기가 참 좋다. 지금도 푸른 하늘 아래 걷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얼른 운동화를 신고 나가보아야겠다. 이제 행복에 껏 취해볼까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