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생각 |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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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과 삶, 삶과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고통과 기쁨, 슬픔, 증오, 분노, 시기, 욕망 그리고 사랑.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분야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전혀 구체적이지도 객관적일 수도 없는 막연한 <관념>을 성찰하게 한다.
관념은 구체적인 인식과 그것이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삶의 이면에 있는 일종의 <카오스>와 같다. 이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염세와 회의>의 문을 지나가야만 한다. 이는 관념의 세계 입구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 입구에서 <관념>의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만다. 불안, 불편하거나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불안, 불편, 두려움을 회피하고 사랑과 희망과 행복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고 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안, 불편, 두려움을 회피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면 일부를 억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억압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관념에 대한 성찰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로부터 거리가 있다. 경제적인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사람들과, 실제 경제생활 문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인문학에 열광하면서도 인문학과 거리를 두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관계,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갈등과 지적 허영들이 복잡하게 충돌하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내 관점으로는 인문학의 열풍 속에서 <허세>와 <허영>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중들이 처음 인문학을 접했을 때 처음 부딪힌 문제는 인문학이 지닐 수밖에 없는 난해함이었을 것이라 의심한다. 인문학의 난해함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우월감이라는 허영과 허세. 사실 대중들은 이해하기 힘든, 어렵고 난해한 분야를 이해하는데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받았던 교육 환경을 되짚어 보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심이다.
인문학은 암기력만으로, 학교 성적의 우위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분야다. 즉, 사유의 고된 작업, 혹은 보이지 않는 지적 노동을 반복하는 노력이 필수인데, 우리는 <그 고된 사유와 사색>과는 거리가 먼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웃지 못할 일들을 종종 겪는다. 자신이 받은 고등교육의 수준, 출신 학교와 사회적 신분과 인문학적 이해와 성찰, 통찰, 소양 등이 동등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며, 알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아마 우리가 델포이 신전 앞에서 무언가 깨닫고자 머리를 찧는다면,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보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이 새겨진 제단이 모래알처럼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신들을 앉혀두고 신들을 가르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 인문학에 대해 논하거나 강연하는 이들의 태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어떤 신도 그의 가르침을 거부해서는 안될 것만 같은 절대자적인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인문. 사람의, 사람에 대한, 사람의 생각에 관한 것들은 과시욕을 드러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돈이 되지는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문학이라는 유행이 일어났던 까닭은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을 돈이 되는 시장 분위기를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지 않나 하는 추측을 한다. 물론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대중들 스스로 <인문학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부분도 컸을 것이다.
나는 대중들 스스로 느꼈던 <인문학의 필요성>을 통해서 인문학에 대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본다. 인문학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회의적이며 비판적인 시선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