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로 발령받을 무렵, 2년 차 병동 간호사 생활을 했지만 정맥 전담 간호사 선생님이 어느 정도는 커버를 해줘서 토, 일요일이나 나이트 때가 아니면 라인을 잡을 일(정맥주사를 놓을 일) 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정맥 주사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외래 부서로 발령을 받고 나서 안심했던 부분이 더 이상 IV 실패로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부서에 가니 생각지도 못했던 인젝이 기다리고 있었다.
*IV = 정맥주사 , 인젝 = 주사
망막을 검사하기 위해서 어두운 검사실 안에서 조영제를 투여하면서 동시에 검사하는 검사가 있었다. 가장 얇은 바늘인, 24 게이지 카테터를 써도 되고 다이렉트로 혈관에 투여를 해도 되지만, 어쨌든 IV였다. 그리고 어두운 검사실에서 스탠드 불빛에 의존해서 환자의 왼쪽 손등, 왼 팔에만 주사해야 하는 것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루에도 이 검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10차례가량 있었고 만약 실패를 할 경우 조영제가 망막 혈관에 도달하는 순간 검사 실패이기 때문에 빠르게 다시 라인을 잡고 재투여를 해야만 했다.
항암을 하는 부인암병동 환자들보다는 혈관 상태가 좋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망막이 안 좋은 환자들은 고령인 경우도 많아서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24 게이지 카테터를 이용하면 그나마 조금 편했지만 카테터는 우리 부서 청구 물품도, 처방을 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른 부서에서 차용해서 빌려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테터 하나도 마음 놓고 낭비할 수 없었다. 최대한 혈관이 좋은 환자는 다이렉트로 주사를 놓고, 혈관이 안 좋은 경우에만 24 게이지를 썼다. 외래인데 인젝이 이렇게 많다니. 고역이었다.
그리고 외래 간호사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외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더 있었다, 외래는 근무복 자체가 타이트한 흰 블라우스에 스타킹을 신고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는 유니폼이었다. 이런 근무복을 입고 하는 일은 병동처럼 활동적이고 빠르지 않고 고상할 것 같았다. 스테이션에 앉아서 조곤조곤 환자 응대를 하고 이런 모습을 상상했는데, 치마를 입고도 거의 뛰어다니듯 경보를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좁은 외래에서 하루 만보 가까이 걷는 다면 말 다했을 것이다. 외래 간호사가 왜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지 근무복으로 바꿔달라는 의견이 나온 지 몇 년이 되어간다는데 말이다.
외래는 수기 차트(검사지)와 전산을 같이 쓰는 형태여서 환자 차트를 스테이션에서 검사실로, 검사실에서 진료 방으로, 끊임없이 운반해야 했다. 그리고 오랜 액팅으로 속도가 붙을 대로 불어서 손이 빠르단 얘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는 느린 편이었다. 진료 방에 들어가서 진료 보조를 하면서 동시에 진료실 밖에서 환자 안내를 해야 했다. 몸이 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두 가지를 동시에 잘 해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또 외래 공간은 좁은데 환자들은 많아서 목청이 터지게 이름을 불러야 환자들이 대답하곤 했다.
준종합병원 정형외과 외래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은 6개월 넘게 일하면서 컴플레인 걸린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대기 시간도 1-2시간 이상인 안과 외래 시절엔 매일, 매주 규칙적으로 컴플레인에 시달리곤 했다. 대기가 한참 길어지는 날이면 10분에 2명씩의 환자가 들어가게 되어있는 병원 전산 시스템 때문에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었음에도, 돈 벌려고 환자 꾸역꾸역 예약한 ‘돈에 눈먼’ 간호사가 되어 욕을 먹어야 했다. 환자 수나 비싼 처치료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안과 검사 중에 산동제를 넣은 날에는 운전을 금지하고 있어서 차를 가져온 환자의 경우 운전을 대신해줄 가족을 부르도록 하거나 다른 날로 외래를 변경해드렸는데, 사전 안내를 했음에도 듣지 못했다고 항의하는 환자가 많았다. 예약 시간에 1-2 시간 늦어서 검사대기 때문에 진료를 볼 수 없는 경우에도 큰소리치며 항의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우리의 잘못은 하나 없는데 환자들을 달래고, 사과하고, 설명하는 일이 병동에서 내가 겪던 여러 어려움과는 다른 국면의 문제로 다가왔다.
안과로 처음 부서 배치를 받았을 때는 근무시간에 굶지 않고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도 행복해했고, 아침에 커피 한잔 타 마실 여유가 된 다는 것에 감사했다. 오죽하면 식당에서 마주치는 옛 병동 차지 선생님들이 ‘쟤가 저렇게 잘 웃는 애였나?’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나에게는 외래 생활도 병동만큼 이나(어쩌면 그 이상으로) 힘들었다.
다시 주사와 관련한 얘기로 돌아가서 지금 다니는 종합병원의 정형외과 외래만큼은 주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병원 처음 면접을 볼 때 정형외과와 내과 외래 자리 둘 다 있었지만, IV가 없을 것 같아서, 라는 이유로 정형외과 외래에 지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취업 후 알게 된 나의 직무는 ‘정형외과 외래 겸 주사실 간호’였다. 그리고 응급실이 없어지고 정형외과로 변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각종 ‘경증 응급환자의 1차 응급 처치’가 이뤄지는 처치실 간호도 내가 할 일이었다.
정형외과 간호사가 주사실 담당 이라니, 내과에는 연차가 낮은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이 주로 일하고 있어서, IV에 자주 실패해서 내과 환자들 수액까지도 전부 우리가 IV라인을 잡는다고 했다. 심지어 영상의학과에도 따로 IV 전담 간호사가 없어서 18G CT 조영제 라인도 우리가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18G는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정맥 주사 시 사용하는 카테터 중에서 가장 굵은 바늘이다.
여기서 놀랄 사실은 내가 18G를 성공시켜본 적이 겨우 열 손가락 넘을까 말까였다는 것이다. 첫 출근 날 영상의학과에서 전화가 왔다. 18G 라인을 잡아야 하는 데, 한 번에 2명 라인을 다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잔뜩 긴장을 한 채 첫 환자 라인을 잡는데, 실패였다. 이어서 반대쪽 팔에서 라인을 잡았는데, 성공했다, 성공의 기세를 이어서 다음 환자도 성공했고, 이 이후로 점차 18G에 대한 공포증은 줄어들게 되었다.
주사실 간호사가 되면서, 정맥 주사에 대한 부담감을 완전히 떨쳐내어야 했다. 하지만 환자들에게 주사를 시도하면서 실력을 쌓기에는 환자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유튜브를 열심히 봤다. 요즘에는 유튜브로 정맥주사를 설명해 주는 영상도 많아서 영상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방법과 감을 익힐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정맥 주사의 비법은, 라인을 잘 잡는 간호사의 주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것이다. 잘하는 선생님의 방법을 자세히 보고 따라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는 것 같다.
여전히 가끔 정맥주사가 내 생각대로 안 풀리는 날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 정말 혈관이 하나도 없는 거동도 안 되는 80대 할머니의 혈관을 한 번에 찾아낸 날이 있었다. 그 할머니 혈관을 처음 찾을 때 쩔쩔매다가 fail 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우리 부서에 그 할머니 라인을 잡을 수 있는 건 베테랑 딱 한 분이었던 터라, 다른 선생님들도, 나도 놀랐다. 정맥이 잘 찾아질 때만큼 소소하지만 기쁜 순간이 잘 없다.
이후로도 주사실에서의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IV 실력은 늘었다. 외래의 모든 간호사와 임상병리사도 못 찾은 혈관을 다리에서 한 번에 찾아냈을 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론 아직 베테랑 선생님처럼 간질, 발작으로 움직이는 환자나 CPR 등 응급상황에서 환자의 혈관을 찾아낸 적은 없다. 하지만 제대로 감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정맥주사는 간호사의 업무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첫 신규들에게 어렵고 두려울 수 있다. 나만 해도 첫 부서에서 정맥 전담 간호사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정맥주사를 잘 못해도 괜찮을 줄 알았고 잘 못하기 때문에 환자 컴플레인을 들을까 봐 회피하기 바빴다. 하지만 처음부터 많이 부딪혔으면 좋았을 걸 후회가 된다. 신규 때. 기회가 주어질 때 많이 도전하고 해 보면 좋다. 두려움과 실패도 한 때일 뿐. 언젠가는 조금씩 베테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