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만난 새로운 이웃
외지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는 아는 사람이 없던 낯선 곳에서 인사 나눌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계했던 사람이 선량하다는 걸 알게 되고, 살아온 곳은 달라도 사는 모습은 같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동질감이 형성되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 사회 속의 일원으로 녹아드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중국에서 생활하는 곳 주변에 단골 가게를 만들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저렴하고 신선한 과일을 사면, 이웃 만들기는 덤
중국에서 체감상 물가가 비교적 싸다고 생각하는 곳은 과일 가게였다(중국 지역마다 가격 차이는 있다). 과일 자체의 가격이 싸기도 하지만, 한 사람이 먹을 양으로 소분하여 팔기도 해서 부담이 적었다. 중국 내 과일 공급과 소비의 회전율이 높기 때문에 과일을 잘라 팔아도 재고 걱정이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수박이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서 내가 여름에 수박을 많이 먹는 걸 생각하면 직접 심어 먹는 게 오히려 더 싸겠다고 농담하시며, 하우스 한 동을 수박밭으로 만들어주실 정도였다. 그토록 좋아하는 수박을 이곳에서는 혼자서 배불리 먹을 만큼 사도 한화 약 2천 원 정도밖에 하지 않으니 부담이 적었다. 그렇다 보니 학교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 앞의 과일 가게에 들르는 코스가 일상이 되었다.
“어서 와요. 수박 줄까요?”
“안녕하세요, 언니. 오늘 수박 달아요?”
“그럼요! 금방 잘라서 줄게요.”
또 어느 날은 요즘은 이 과일이 제철이라 맛있다며 소개해주었고, 한번 맛보라고 덤으로 한 두 개씩 넣어주기도 했다. 과일 가게 언니가 이 과일은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려주면서 종종 살아있는 공부 현장이 되기도 했다.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몇 번 나누다 보니, 내게도 지나다가 스스럼없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이웃이 생겼다.
- 낯선 사람에서 이웃으로, 이웃에서 친구로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교 캠퍼스 내에 이제 막 문을 연 카페를 발견했다. 도서관보다 거리가 훨씬 가깝기도 하고, 중국어를 중얼거리며 공부하기에 좋아 자주 찾게 된 곳이다. 유학 온 지 얼마 안 된 때에는 커피 한 잔 주문하는 것조차 내게 큰 미션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두려움과 낯선 단어 배우기에 대한 귀찮음이 조화를 이루면, 매번 같은 메뉴만 주문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한다. 어느 날 카페에 들어서 주문하려는 순간,
“따뜻한 라떼, 맞으시죠?”
라며 카페 직원이 나를 알아보았다. 이 한 문장으로부터 카페 직원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얼굴이 나를 알아봐 주는 순간 선명해지면서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왔다. 누군가 나를 반겨주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더 자주 가고 싶은 곳이 된다.
카페를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 메뉴와 운영에 대한 고민이 많은 그들은 내게 음료와 케이크를 주며 맛 평가를 부탁했다. 미각이 그다지 예민하지 않은 나로서는 최대한 성의를 보이기 위해 맛있다는 표현 외에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까 꽤 애를 써야 했지만, 덕분에 공짜로 맛있는 걸 얻어먹게 되었으니 이 정도 고민쯤이야.
커피를 마시며 공부를 하고 있으면, 카페 직원이 한가한 틈을 타 중국어 공부를 하는 외국인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교재를 훑어보고 중국어 공부에 도움 줄 부분이 있는지 묻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중국 현지에서 가장 좋은 공부법이라고 대답하고 부족한 중국어로 간단한 수다를 떨었다.
(사실 헷갈리는 문법 문제가 있어 물어본 적이 있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그 친구가 말해준 답은 오답이었다. 우리가 한국어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문법을 생각하며 말하기보단 언어를 습관적으로 쓰다 보니 그런 듯하다. 시험지 상의 언어 공부와 현지 언어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걸 느꼈다.) 반대로 나는, 한국인 유학생 손님들을 맞이하는 그들에게 간단한 한국어 인사 등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중국어 시험 합격 소식을 전한 어느 날, 축하해야 할 일이니 밥을 사주겠다는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주문조차 버벅대던 내가 그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게 되기까지 그들은 (아마도 인내심을 가지고) 같은 단어를 여러 번씩 말해주었다. 역시나 언어 공부에 있어서 현지인과의 소통이야말로 가장 좋은 학습 기회이다. 그렇게 유대관계가 점점 깊어지면서 이웃이었던 그들과 나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커피 향과 함께 반겨주는 직원들의 미소 섞인 인사. 바깥 날씨로부터 지켜주는 온도의 품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그 시간이 나의 유학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낯설었던 타지에서 나의 안부를 물어봐 줄 이웃과 익숙한 장소가 생긴다는 것. 그곳에서의 시간을 더욱 아늑하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