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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Oct 15. 2019

모든 죽음은 평등하지 않다.

2019년 10월 15일 스미스의 생각


설리 사태를 직면하며.


1. 모든 죽음은 평등하지 않다.


과거, 모두에게 시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 적 있다.

동등한 시간이라 하더라도, 생계를 위해 하루 7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는 취업 준비생의 1시간과,

부모님으로부터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느끼는 1시간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과거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도 능력이야’라고 말한다면 딱히 덧붙일 말은 없다.


얼마 전 죽음도 평등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것을 목격했다.

삶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부여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사회가 타인의 죽음을 소비하는 방식은 다 달랐기 때문이다.

설리의 사망은 사회에 꽤나 큰 충격을 준 것 같지만, 

여전히 일각에서 이를 다루는 모습은 저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주장했던 ‘노브라’를 기어이 끼워 넣어 죽음을 깎아내리거나,

‘관음’을 뛰어넘어 시신에 대한 포르노 그라피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부고 기사를 통해 한 인물의 생애 전반을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침묵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유력 정치인의 죽음과, 한 연예인의 죽음 사이에는 이렇듯 큰 격차가 존재한다.


죽음도 양극화가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2. 말하기


우리가 그녀의 죽음을 대할 때

단순하게 한 개인의 우울증을 탓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자살을 미화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지만

자살을 무시하고 넘기는 것 역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나는 이 사건이 누군가의 말하기를 제한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우려한다.

이미 ‘이론상으로’ 많이 언급되어왔던 악플 논란과 관련해서다.

그동안 우리는 악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론적인 이야기는 금방 날아가 버렸다.

오히려 악플을 악플로 대항하는 ‘개싸움’을 하는 것으로 대안을 삼으려 했다.

누구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죽음에는 일종의 권력관계가 작용했다고 본다.

그녀가 받았던 악플의 내용을 보면 소위 연예인, 여성이라는 점을 이유로

더 크게 비판받는 지점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 사회에는 연예인은 비판해도 괜찮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일반인이 어떻게 차별주의자가 되는지를 다뤘듯,

우리는 그녀가 주장하는 바가 드러나지 않은 권력관계에 의해 피해를 받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말하는 자유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

소위 ‘까방권’까지는 바라지 않았더라도 개인에 대해 이렇듯 무차별적인 혐오가 쏟아지는 것.

그녀가 가장 견뎌내기 힘들었던 지점이 아닐까.


여전히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많다.

국회에는 동료 의원에게 욕설을 하는 의원이 있고, 

강단에서도 입에 담기 힘든 말을 제자에게 하는 교수도 있다.

위안부의 강제 동원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인물은 떵떵거리며 잘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개인의 자유를 논하던 한 상징의 죽음이 

말에도 권력관계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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