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 주특기는 짝사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세상 누구보다 '금사빠'였고 마음속에 호감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만큼, 고백할만한 용기는 갖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냥 짝사랑에서 끝나고 말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지만 고백이라는 행위가 불러올 의무와, 부담감, 또 거절당했을 때의 부끄러움은 무서웠다.
그래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좋아했다. 그것이 단순한 호감이었는지, 진지한 감정이었는지는 기억도 잘 안 날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만큼 연애를 쉽게 할 수 있는 시절도 없는 것 같다. 나는 대개 짝사랑에서 그치고 말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은 쉽게 누군가를 만나고 또 쉽게 헤어졌다. 그들에게 연애란 마치 학교에서 짝꿍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인듯했다. 누가 누구와 사귀었는지, 그들은 얼마나 오래 만났는지를 전교생이 다 알만큼 연애는 흔한 일이었다.
그런 풋풋한 청소년 시절뿐만 아니라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연애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20대에게는 술이라는 마법의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20대의 술자리 문화가 대개 그렇듯, 누군가와 누군가를 이어주고, 술김에 누구에게 고백하고 이런 모습들이 자연스러웠다. 그만큼 연애의 무게감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벚꽃이 필 때쯤 연애를 시작해 벚꽃이 질 때쯤 연애가 끝난다는 소위 '벚꽃 커플'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군대를 갔다 오고, 본의 아니게 나이를 먹으면서 연애가 주는 무게감은 눈에 띄게 커졌다. 더 나아가 취준생이 되고 나서는 일종의 '사치품'으로 까지 전락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비해 연애를 할만한 대상을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도 그 사람이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아진 게 더욱 큰 이유였다. 결국 연애 상대를 찾고,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다. 과거에는 짝꿍을 바꾸는 정도로 빈번했던 연애라는 행사가 취준생의 눈으로 볼 때 쉽지 않은 선택지가 돼버렸단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도 늙어버리는 걸까.
최근 한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나처럼 그 친구도 취준생이기에 괜히 걱정이 됐다. 평소 연애에 에너지를 많이 쏟는 타입이라 상대방과의 관계를 빌드업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데, 걱정스러운 맘이 먼저 들다니..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연애를 걱정해야 하는 이 어처구니 상황이 만들어진 데에는 '불완전성'이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취준생이 찐따 존을 지나는 동안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녀석 말이다.
다음에 이 불완전성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풀어낼 기회가 있을 테니, 오늘은 짧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취준생의 연애에 있어 불완전성이 미치는 영향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노력과, 돈에 관한 부분,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다.
연애를 시작하려면, 또는 유지하려면 시간과 돈이 든다.
하지만 취준생의 경우 돈이 많으면(알바를 하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다.
또한 연애를 하면 금전적인 소비 못지않게 감정적 지출이 크기 때문에 이 부분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결국 연애대상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양쪽 모두가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다. 환경에 대해서는 어찌어찌 타협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내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남는다. 지금 이곳에서 연애를 했을 때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상대방과의 관계가 어떻게 끝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시작은 더더욱 조심스럽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붕 떠있는 상태가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연애요? 그거 돈 있어야 하는 거예요."
너무 비싼 집값 때문에 집 사기를 포기하는 사람들, 결혼 비용과 자녀의 양육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처럼 언젠가는 연애도 '있는' 사람들만 꿀 수 있는 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완벽한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굳이 소모적인 연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도 등장할 수 있겠다.
이유야 어쨌든 사랑을 주고받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김훈 작가는 <라면을 끓이며>라는 책에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젊은이들이 공원에서 입맞춤을 하는 장면을 보면서 흐뭇해한다.
젊은 사람들의 사랑이 눈에 보일수록, 사회가 잘 유지되고 있음을 느끼는 마음에서다.
그의 마음처럼, 어느 순간 연애를 사치로 바라보게 된 취준생의 눈에도 사랑이 깃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