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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May 28. 2019

M누나의 쓰여지지 않은 서평

(술자리 대화에 기반하여 쓴) <사람아 아, 사람아> 서평 

쓰여지지 않은 서평#1            

이 글은 일부 사실에 기반하였지만 많은 부분 허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의기소침하고 기운 없는 내가 좋은 먹잇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누나는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나에게 장난을 치고 놀려대었다. 아, 그 모습은 마치 죽은 시체를 파먹는 한마리의 하이에나 같았다.

“나 좀 속상해.”


독서모임이 끝나고 가진 술자리에서 M누나가 입을 떼었다. 10명 남짓의 인원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매주 책을 읽고 서평을 써서 각자가 쓴 글을 갖고 이야기를 나눈다. 멤버들이 편집자 지망생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15명의 멤버였으나, 몇 명이 출판사에 취직해 본격 편집자의 길을 걸으면서 인원이 대폭 줄었다. 쓸쓸히 뒤에 남아 먼저 떠난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우리는 아직 편집자 지.망.생. 다른 말로 미생이었다.


"야, 나 정말 진지하게 고민이야."


항상 밝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시덥잖은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M누나였기에, 속상하다는 말을 입에 담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M누나답지 않은, 축 쳐진 목소리였다.


M누나를 비롯한 모임 사람들은 2달 전 출판편집 공부를 하면서 처음 만났다. 편집자 지망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아카데미에서였다. 그때 나는 졸업까지 한 학기를 앞둔, 그러나 취업에 대해 전혀 준비가 안되어 전망이 어두운 대학생이었다. 별로 준비가 된 게 없으니 마음이 급했다. 내세울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내가 기획하고 편집한 책을 내고 싶었다. 무모한 생각이었지만, 기획과 편집에 대해서 어떤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이 되었다. 또한 앞으로 들어갈 출판사에 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금을 아끼기 위해 번역까지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으나, 내 앞에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반면 M누나는 홍보회사를 다니다가 출판 일에 뛰어들기 위해 회사를 관뒀다. 큰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직하는 것이 꿈이었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활동적인 이 누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선시했다. 각자 처한 상황이든, 아카데미에 들어온 목적이든, 성격이든 여러모로 나와 잘 안맞았다. 의기소침하고 기운 없는 내가 좋은 먹잇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누나는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나에게 장난을 치고 놀려대었다. 아, 그 모습은 마치 죽은 시체를 파먹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M누나에 대해 좋은 감정보다 악감정이 더 많았다. 저 누나는 왜 나만 보면 항상 놀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보이나 싶었다. 그래도 천만 중 다행으로 M누나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둘 다 담배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담배가 M누나와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마다 주차장으로 나가면 항상 M누나가 먼저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머쓱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항상 먼저 아는 체를 하는 것은 M누나였다. 


우리는 담배를 피며 허심탄회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윤문 교정은 공사판 막 노동자가 하는 일에 버금가는 노가다라는 둥, 취직하면 어차피 디자이너가 따로 있어 본문 조판은 불필요하다는 둥, 사람들이 표지디자인에 그렇게 애를 쓰는 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가식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둥 일에 관련된 많은 잡담들을 나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렇게 달라 보이는 나와 M누나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둘 다 이 일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 


“나 서평을 좀 잘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 다들 서평을 맛깔나게, 멋들어지게 잘 쓰잖아. 그게 부럽고 나도 그렇게 쓰고 싶은데 항상 실패야.”


술잔을 몇 번 기울이던 M누나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실력이 부족한 내가 봐도 누나의 서평은 어딘가 좀 아쉬워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정리가 안 되는것 같았다. 문단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다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문단에서 이 얘기를 하더니, 두 번째 문단에서는 저 얘기를 하고, 세 번째 문단에서는 다른 얘기를 하는 식이었다. 누나가 자신의 서평에 대해 얘기할 때면 자기 위기가 해졌다. 그럼에도 M누나는 자신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꿋꿋이 발표를 했다.


“다들 서평을 잘 쓰는걸 보고 비교하게 되더라고. 그러면서 기 죽게 되고. 이게 정말 내 길이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


M 누나는 예전에 일하던 홍보회사가 정말 더럽고 치졸하다고 했다. 마음에 없는 말로 에이전시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가장 존경하는 척 연기하고, 때로는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까지 일을 했다. 에이전시 때문에 화가 나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상사가 화나게 하면 일부러 타지 않아도 될 택시를 타고 법인카드를 긁었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매일 매일 야근이 끊이지 않았고,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큰 돈이 걸린 사업을 계속 맡아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업무 보고를 늦게 하면 몇 억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부산까지 업무 보고를 하러가야 돼서 KTX를 탔는데, 자칫 잘못해서 역을 지나칠까봐 볼펜으로 무릎을 콕콕 찌르며 억지로 잠에서 깼다. 


그렇게 일을 해도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서로가 밟고 밟히는 진흙탕과도 같은 홍보업계에서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월급날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돈이 통장에 들어와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은 쌍문동 자취방이라는 M누나만의 공간에서 서유기를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사에게 잘 보여도,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고 회사 생활에 모든 걸 쏟아보아도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나는 꿈을 선택하기로 했다. 


“나는 내 이상을 추구하고 싶은데, 그게 정말 막연한 이상으로 그치지 않을까 싶어. 내가 편집자가 될 거란 보장도 없는데 서평 하나 제대로 못쓰면서 뭐 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이상은 이상으로, 마음속에 간직해야지.”


그러면서 누나는 우리가 그 날 읽은 책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책으로,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과 이러한 격변기 속에서의 중국 지식인의 운명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격동에 휩쓸린 등장인물들이 어떤 비극을 겪고,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대격변에 대처하는 방식도 책에 등장하는 11명이 제각기 다 다르다. 


M누나는 11명의 등장인물 중 리이닝이 제일 좋다고 했다. 리이닝은 주인공이 아니고, 책의 분량 중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변인물이다.


리이닝은 소설의 주인공 쑨위에의 친구로 등장한다. 둘은 친구이긴 하지만 매우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쑨위에가 강인한 이상주의자라면, 리이닝은 온건한 현실주의자이다. 쑨위에가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할 때 리이닝은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민한다. 쑨위에가 문화대혁명이 야기한 고통을 정치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리이닝은 정치에 더는 관심 기울이지 말고 사랑으로 아픔을 치유하자고 말한다. 리이닝은 이상은 잠시만 마음 속에 묻어두고 현실에 안주해 안락한 삶을 꾸리자고 말하는 캐릭터이다.


“나는 쑨위에랑 리이닝 중에 누가 더 맞는지,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것 같아. 그렇지만 나는 왠지 리이닝에 더 공감되고 끌렸어. 나는 현실에 안주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의지가 강한 사람은 이상을 쫓겠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 내가 재능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냥 내가 하던 일로 돌아가려고. 거기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꿈은 이뤄질 수 없으니까 꿈이라는 말이 있잖아. 이상은 이상으로, 마음 한켠에 간직할거야.”


누나의 말에 잠시동안 말문이 막혔다. 누나가 놀릴 때면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재깍재깍 맞받아치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렴풋한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막상 그 자리에서는 말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리이닝에 대해 놓치는 많은 부분이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리이닝이 쑨위에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으나, 남편이 당시 체제에서 탄압받는 부르주아였던 것이 문제가 된다. 남편은 자기가 살기 위해 그녀를 배신하였다. 그녀가 나라를 팔고 적에게 투항하려고 모의했었다고 선수를 쳐 고발한 것이다. 별 것 아닌 일이 마녀사냥으로 번졌고, 그녀는 그 결과 ‘머리를 절반쯤 잘리고 땅바닥을 개처럼 기도록 요구받았다.’ 사실 그녀는 너무 엄청난 고문에 시달려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순간, 술에 취한 M누나의 모습에서 리이닝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았다고 한다면 과언일까. 3초 김태희, 3초 전지현, 3초 송혜교처럼 ‘3초 리이닝’을 보았다고 해도 무리일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느라 너무 지쳐서 이제 그만 안주하고, 쉬고 싶어하는 리이닝의 고된 모습이 M누나에게서 보였다는 것이다.


“너 서평, 솔직히 잘 쓰더라.”


나는 처음에 M누나의 말을 잘못들은 줄 알았다. 맨날 나를 놀리기 바쁜 M누나가 나한테 칭찬을 해줄 리가 없는데. 나 스스로 항상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국문과 K형한테 가끔 글을 보여주면 매일 지적받고, 고칠 거 투성이라는 소리를 듣는 나인데. 나도 매일 지적당하고 지적당하면서 글을 계속 쓴 결과 조금은 나아진걸까. 내 노력을 조금이라도 알아봐준 M누나가 고마웠다.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갖고 글을 써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M누나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는 이상을 쫓아, 쑨위에처럼.”


나는 운이 좋았다. 가족들이 다 책을 좋아해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으며 클 수 있었다. 집안 사정도 나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우리 집 살림도 괜찮았고, 여러 모로 보나 여타 상황도 좋았다. 전공도 어학계통이라 출판 편집에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정 안되면 번역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부딫혀보니,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출간한다고 해도 서점에 깔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전에 어떤 책도 내보지 않았던 나를 서점관계자가 상대나 해줄까. 문전박대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또한 첫 책을 낸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 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출판사는 10권을 내면 그 중에 한 권이 출판사를 먹여 살린다. 이 말인즉슨, 적어도 10권의 책을 출간해야 그때부터 제대로 된 수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번역은 어떻고? 외대 통번역대학원 출신들이 날고 기는데? 그런데도 경쟁이 너무 치열해 번역으로는 들이는 수고에 비해 많은 돈을 벌지 못한다.


누나, 짠하죠. 잔을 기울였다.


누나, 저도 소설을 읽으며 리이닝에게 많은 공감이 갔어요. 리이닝은 소설의 주인공은 아닐지 모르죠.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더 끌리고,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세상을 바꾸는 건 큰 이상을 품은 쑨위에일거에요. 그렇지만 리이닝이라고 해서 세상에 아무 기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리이닝은 중학교 정치 교사잖아요. 학생들이 장차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나도록 가르치면서 리이닝은 자기 나름의 정치, 자기 나름의 이상을 실현시키고 있는 거에요.

사람이 어떻게 정면 돌파하고만 살 수 있나요. 너무 힘들면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싫어질 수도 있고, 힘들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거지. 정치가 싫어서 도망칠 수도 있고, 재능이 없으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거지. 저는 쑨위에가 너무 고상한 척 한다고 생각해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누구나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는거죠. 저도 책을 한권 내보겠다는 생각을 언제 접을지 모르는 일이고, 주위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가치관이나 신념도 의외로 쉽게 바뀔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끝내 현실과 타협하면서 꿈을 포기할지도 몰라요. 저 또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인 것 같네요.

소설에서 인생은 길과 같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길이 끝나는 것 같은 곳에 새로운 길이 이어지고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진다고 하잖아요. 길은 끝나지 않아요. 그냥 다른 길로 이어질 뿐이죠. 아무 관련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게 다 관련이 있고, 다 도움이 되는 거에요. 리이닝이 분명 힘든 일을 겪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기는 했어도, 그러한 것들이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자양분이 되었을거에요.


여기서 나는 말을 삼켰다. 결국에는 말하지 못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그러니까 누나도 지금 잠깐은 리이닝처럼 방황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용기 내요. 지금 잠깐 방황하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의 경험이 인생 전체로 보면 결코 헛되지 않을 거에요.


-p.s 

내가 리이닝에 빗대어 결국에는 본인 얘기를 한 것이었음을 술에 취한 이 누나가 알아챘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이 M누나의 입말에 의존해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은 안비밀. 이 글이 서평 못쓰겠다는 M누나를 대신해서 써준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라는 건 안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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