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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Dec 08. 2019

허무에서 쏘아올린 동경의 화살

<위대한개츠비>에 대해

허무에서 쏘아올린 동경의 화살, <위대한 개츠비>




교수님이 그랬다. 당신은 소설을 당시의 사회상을 읽어내기 위한 하나의 도큐먼트로 대한다고. 이는 문학작품감상의 한 갈래로, 어떤 문학작품을 읽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내게 문학을 대하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교수님과 함께 읽은 <위대한 개츠비>가 그 시작이었던 점에서 내게는 의미가 크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묘미 중 하나는 소설에 묘사된 여러 상징적 장치를 통해 당시 미국사회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재의 계곡(valley of ashes)에 설치된 에클버그 의사의 눈과 개츠비가 밤마다 여는 파티, 이스트 에그와 웨스트 에그의 대조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미국사회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색빛 땅과 그 위에 발작적으로 피어오르는 먼지 너머로, 잠시 후 T.J. 에클버그 박사의 눈이 떠오른다. T.J. 에클버그 박사의 두 눈은 푸르고 거대한데-그 두 눈의 망막은 폭이 1야드나 된다. 얼굴은 없고 눈만 있다. 존재하지 않는 코에 걸린 거대한 황색 안경 너머로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어떤 장난꾸러기 안과 의사가 퀸스 지역 환자를 모으려고 간판을 걸어놓았을 것이다. 그런 뒤 그 자신은 영원히 눈이 멀어버렸거나 혹은 간판을 잊은 채 떠나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T.J. 에클버그의 눈은 수많은 얼룩진 날들이 지나는 동안 햇빛과 바람 때문에 좀 흐려지긴 했지만, 멸망해가는 쓰레기장 위에서 여전히 깊은 사색에 잠겨있다. 


1차대전 후 유럽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은 1차 대전이 막 끝난 1920년대의 미국이다. 사람들은 이전에는 없던 대규모 전쟁을 겪고 나서 정신적 공허감에 빠지게 된다.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이 승리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유례없었던 학살과 파괴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평화와 번영에 대해 갖고 있었던 환상을 무자비하게 깨뜨려 버렸다. 그로 인해, 이전에 서구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던 정신적 가치, 도덕들에 대해 사람들은 환멸을 느끼고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실질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된다. 산업시설의 파괴를 당하지 않은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유럽은 산업시설이 거의 파괴되어 복구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많은 물자를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후복구에 뛰어든 미국의 기업은 새로운 산업시설을 세웠고 투자를 하면 반드시 커다란 이익이 따랐다. 따라서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투자를 했고 쉽게 떼돈을 번 졸부들은 거대하고 화려한 주택을 짓고, 방탕한 파티를 즐기며 최신식 자동차를 사고 사치를 즐겼다.


1차대전후 미국의 풍경

이렇다 할 정신적인 가치관이 부재한 상태에서 얻게 된 물질적인 번영은 미국을 극한의 황금만능주의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얻은 대신 사랑과 진리, 열정과 꿈을 잃어버렸다 (Lost generation 잃어버린 세대). 텅 비고 가난한 영혼을 달랠 방법으로 사람들은 술과 환락에 빠져들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츠비가 여는 파티에서 이러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파티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는 가운데 술을 마신 사람들이 잡담을 주고받으며 모였다가 흩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서로를 소개받고도 그 자리에서 금방 잊어버리는가 하면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열띤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파티는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기 보다는 단지 고독과 허무를 달래기 위해 하룻밤을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도 진지한 교류와 소통을 하기 보다는 ‘불빛 아래의 부나비’처럼 무의미한 즉흥적인 향락에 취한다. 돈을 쫓아서 파티에 온 사람들도 있다. 파티에는 젊은 영국인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는데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부유해 보이는 미국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아 이들은 증권이든 보험이든 자동차든 뭔가를 팔기 위해 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Owl eyes"라는 파티의 방문객은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며 놀라운 리얼리즘이라고 감탄한다. 서가에 무수히 많은 책들을 꽂아 놓은 것을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한 일종의 무대장치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돈만 있으면 현실 또한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예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파티는 당시 사람들의 물질만능주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물질만능주의는 삶에 대한 무의미와 무목적성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에클버그 안과 의사의 눈

에클버그라는 안과 의사가 재의 계곡에 세워놓은 광고탑은 어떤가. 재의 계곡은 뽀얀 먼지가 그 근처를 뒤덮고 있고 온갖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곳이다. 에클버그 의사의 두 눈은 재의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다. 얼굴은 없고 두 눈만이 있는 이 광고탑은 신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키거나 교훈을 주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클버그 의사의 두 눈은 신은 신이되 더 이상 신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차 대전 이후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신이 있다면 그렇게 큰 전쟁을 왜 막지 못했나 하는 의구심이 그 중심에 있었고 신에 대한 신뢰가 깨져 버렸다. 신은 우리를 버렸다. 우리 또한 신을 버렸다. 그렇게 신은 버려졌고 그 자리를 상업주의를 상징하는 광고판이 대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아메리칸 드림’은 재의 골짜기처럼 악취를 풍기고 있으며 안과의사의 광고탑처럼 상업주의로 변질되었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국적인 이상 사회를 이룩하려는 꿈이다. 다수 미국인의 공통된 소망으로 무계급 사회와 경제적 번영의 재현, 압제가 없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영속 따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난다. 작가는 개츠비를 웨스트 에그에 톰과 데이지를 이스트 에그로 보낸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그들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묘사된 셈이다. 


웨스트에그는 신흥부촌으로 순식간에 돈을 모은 졸부들이 사는 곳이고 이스트에그는 나름의 전통을 갖고 재산을 세습 받아온 귀족들이 사는 곳이다.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의 사람들은 직업이나 신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스트에그의 사람들 중에는 닉과 함께 예일 대학교를 다녔거나 박사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속해 있다. 이는 이스트에그 사람들이 전통적인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들은 자기네들끼리 구석에 모여 있다가 누가 가까이 접근하면 코를 벌름거리는 등 외부인에 대해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외부인과 섞이지 않고 자기네들만의 결속을 보여주는 모습, 수준 있는 교육을 받았다는 특징들은 이스트에그의 사람들이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귀족들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스트에그의 사람들은 부랑자와 싸움을 벌이고 몹시 술에 취해 자갈 차도에 자빠져 있다가 자동차에 오른손을 치고 마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트에그의 사람들이 물질적 부와 세련미와 교양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거의 타락한 상태에 있으며 부주의하고 무책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웨스트에그의 사람들은 20세기에 막 떠오른 산업인 영화,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영화 업계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이들이 이스트에그의 전통적인 귀족과는 달리 개츠비처럼 갑자기 떼돈을 번 신흥부자들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들은 파티에 온 주 목적이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보이는 돈에 대한 관심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정신적 빈곤 상태 속에서 물질만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개츠비가 묘사한 현실은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신적 빈곤상태의 본질은 허무주의다. 인생의 목표가 없고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청춘들. 왜 사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 그 의미를 찾지 못하고 개인적 안위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 모든 가치가 전도되어 버렸다. 


허무주의 상태를 표현한 한 철학자의 유명한 말이 있다.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많은 이념이 발전했다. 자본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등 그런데 이 중 어떤 것도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체제는 없다.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상실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실험된 시대일지도 모른다. 한 때 히피들의 구호처럼 사용된 이 말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허무주의가 일상화되고, 누구도 허무주의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정신적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혀 이상을 품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좇는다. 그러나 이상을 갖지 않으면 현실을 보지 못한다.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이 어떻게 현실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이처럼 자신 위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는 사람들, 톰과 데이지로 대표되는 인간 군상이다. 이들은 이익만 추구하고 메뚜기 떼처럼 지상의 작은 곤충이 되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행복하다고 스스로 안위하는 존재들이다. 사실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이란 돈과 물질이 풍요로운 세상이다. 

톰은 데이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은 데이지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데, 이는 데이지를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톰에게 있어 데이지는 자신이 가진 막대한 부와 마찬가지로, 잃어서는 안 되는 소유물이다. 또한 톰에게는 이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현실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랑이나 정신적 가치를 위해서 물질, 돈, 권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물질, 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 순수, 정신을 져버리는 물질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닉은 이러한 톰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반면에 개츠비는 데이지가 속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좇는 이상과 사랑을 위해 물질, 돈, 권력을 희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되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적어도 개츠비는 이런 물질만능의 시대에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상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기에, 작가는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평하고 있는 듯하다. 개츠비의 위대성은 바로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꿈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추구하려는 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면모도 보이지만 이상을 추구하고 모든 것을 그것에 바친 헌신적 노력들이 작가의 눈에는 숭고하고 위대하게 느껴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위에서 인용한 <위대한 개츠비>의 구절은 작품 외적으로는, 문학을 읽는 새로운 갈래의 방법론을 제시해주었고, 작품 내적으로는 나 또한 허무주의의 시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이러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진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최고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지만, 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면 스스로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내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들이 말한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라는 말 역시 삶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어찌 보면 의미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의미 없는 존재가 의미 있는 이유가 있다. 의미 없는 존재가 의미 있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질 줄 안다.” 이는 ‘의미 없는 존재의 의미 부여가 바로 너의 삶이다.’라는 뜻이다. 개츠비에게는 그러한 의미 부여가 바로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었다. 즉 그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정했다. 


피츠제럴드는 최고의 지성이란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을 가지며 어떤 일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면서도 이를 바꿔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개츠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현실은 절망적이고, 이상은 비현실적이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자체가 시대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츠비 같은 인물들의 시도가 계속되고 닉과 같은 인물들이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며 타락해버린 현실을 바꾸고 있다는 이야기를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개츠비는 죽었지만 그의 꿈은 아직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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