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그림소설 #08
샴푸가 떨어져 며칠째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퇴근 후 샴푸를 사는 것을 바보처럼 까먹는 것이다. 아침에서야 샴푸가 떨어졌다는 걸 다시 알게 된다. 비누로 머리를 감으니 머리의 상태가 마른미역처럼 뻣뻣해졌다. 기분 탓이겠지만 머리도 더 빨리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다행히도 퇴근 후 떨어진 샴푸가 생각이 나서 마트에 들어갔다. 마트 이름은 코끼리였다. 코끼리처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중간한 마트였다. 샴푸가 있는 코너에는 세일 중인 샴푸가 있었다. 샴푸통에는 ‘당신의 머리를 춤추게 해 드립니다.’라고 적혀있고 1+1 행사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그 샴푸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바로 샤워를 했다. 새로운 샴푸를 써보고 싶어서 머리를 감았다. 비누로 감다가 샴푸로 감으니 기분이 좋았다. 장미향이 났다. 거품은 구름처럼 머리에서 떠올랐다. 시간을 들여 거품을 씻어낸 뒤 샤워를 마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이상하게 머리가 더욱 곱슬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거울 속 내 얼굴이 조금 더 잘생겨 보였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너무 졸려 일찍 잠에 들었다.
눈을 떠서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내일도 출근이라 계속 잠을 자려고 했지만 욕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다. 나는 몸을 살짝 일으켜 스탠드 불을 켜고 조용히 그 소리를 듣는다. 환청이 아니다. 누군가 나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 문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내가 잠든 사이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회사 때문에 서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고 부모님은 고향에 계신다. 그러니 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현관문 쪽으로 가서 문 상태를 보았다. 현관문은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보조 걸음 장치 까지 완벽하다. 화장실에는 여전히 물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골프채나 야구방망이 같은 것.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다. 나는 결국 부엌 쪽에 식칼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욕실 문으로 가서 귀를 대보았다. 여전히 콧노래 소리와 물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노래다. 하지만 무슨 노래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제목을 알고 싶었지만 지금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구멍을 나서기 전의 생쥐처럼 숨을 크게 쉬었다. 내가 오히려 도둑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불을 켜고 있는 힘껏 문을 열었다. 욕실에는 거품이 사람 형태로 서 있었다. 거품 인간이었다. 샤워기 물은 바닥에 틀어져있고 새로 사온 샴푸가 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거품이 사람 모양으로 자라나 있었다. 마치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야!?” 나는 말했다.
“음~ 음음음~~랄라~” 거품 인간은 대답 없이 계속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음음음~~라라라라~” 거품은 춤까지 추었다. 큰 춤은 아니었고 그저 작게 흔들거렸다. 나무가 바람이 흔들리듯이. 나는 무서워 손에 들고 있던 칼로 그에게 휘둘렀다. 그의 몸이 반으로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재생되었다. 그리고 다시 콧노래를 불렀다.
“음~ 음음음~ 라랄”
나는 왠지 증거사진을 담아놓아야 할 것 같았다. 스마트폰이 있는 곳을 달려갔다. 그리고 폰을 가져와 그를 카메라에 담았다. 찰칵 소리가 내 방과 욕실에 가득 채웠다.
“찰칵!”
“으악!” 거품 인간이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으면 싫어하는 듯 보였다.
“찰칼! 찰칵!” 나는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으악!!”
거품 인간은 소리를 치고 점점 줄어들더니 작은 거품이 되어 하수구로 사라졌다. 작은 거품 두 방울은 사람의 눈동자처럼 보였다가 하수구로 마저 빨려 들어갔다. 나는 폰을 내려놓고 샤워기 물을 잠근 뒤 샴푸 뚜껑을 꽉 닫았다. 그리고 샴푸를 들어 욕실 서랍에 넣어두었다. 욕실에 불을 끄고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심장이 아직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뛰고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이 공포를 누군가에게 알릴 수도 신고할 수도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에 누워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일은 출근이다. 자야 한다. 그게 중요하다.'라고 내 머리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폰을 들어 알람을 맞춘 뒤 사진첩을 열었다. 그 거품 인간의 사진을 보기로 한다. 사진첩에 들어가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누른다. 하지만 내가 찍은 사진에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거품 인간은 담겨있지 않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초라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