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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 바이허니 Oct 23. 2021

계면활성제와 연리목, '물' 만나다

Thanks to_책세권으로 이끈 사람들 2

Thanks to_책세권으로 이끈 사람들




계면활성제, 수헌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수헌과 저는 연인 사이였어요. 1989년, 수헌은 16일차 신입사원이었고 저는 16개월 차 국어선생이었답니다. 저는 봉화에 살았지만 수헌의 직장은 울산에 있었어요. 


  수헌은 30년 동안 계면활성제(界面活性劑) 원료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계면활성제는 물에 녹기 쉬운 친수성 부분과 기름에 녹기 쉬운 소수성 부분을 가지고 있는 화합물이에요. 그런 성질 때문에 비누나 세제 등으로 많이 활용되고요.   

  그런데 계면화학을 오래 연구해서일까요? 시나브로 주인이 물건 따라가는 거 있죠? 아, 어쩌면 그의 기질이 계면활성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물과 기름처럼, 성질이 다른 두 물질이 맞닿는 경계가 그의 자리였고 경계면에 달라붙어 표면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으니까요. 


  살아갈수록 녹여야 할 경계는 넓어졌겠지요. 회사와 거래처, 상사와 부하직원 경계는 물론 부모와 아내, 아내와 딸 사이에서 수헌은 계면활성제가 되었어요. 기름을 잘게 쪼개 물에 녹아들게 하듯, 자신을 해체하여 기름과 물을 잇고 만나게 했던 거죠.

  저는 물인가 봐요. 저와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제 쪽으로 들어왔거든요. 게다가 상대편은 저에게 섞여드는 걸 억울해하지도 않았어요. 다 제가 잘나서 그런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야 느끼는 게 있어요. 이를테면, 그렇게 되도록 해왔던 게 수헌의 능력이었다고요.


  땅을 산 7년 뒤, 수헌과 저는 두동에 집을 짓기로 했어요. 도심의 아파트를 떠나본 적 없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삶의 전환점이었지요. 엄청 두려웠어요. 하지만 집이 바뀌면 집 안을 채우는 삶의 모습도 달라질 거라고, 그곳에 가장 어울리는 삶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직장이 멀리 있어 주중엔 혼자 지내면서 그야말로 ‘회사밖에 모르는 오십 대 직장남’인 수헌도 결단을 내렸지요. 새로 지어질 집에서 자신의 삶을 가장 자신답게 채울 일을 찾고자 했거든요. 맞아요. 퇴사, 그리고 커피!


  『커피는 과학이다』는 생두를 볶는 과정, 커피 성분을 우려내는 과정, 우려낸 커피가 식는 과정 등에 적용되는 과학적 원리를 담은 책이에요. 화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이자 계면활성제를 만들어온 ‘기술자’이기도 한 수헌에게 커피가 잘 맞았어요. 

  커피를 볶는 일도, 커피를 내리는 일도 차분하게 화학적 변화를 체크해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에요. 한 가지에 꽂히면 극도로 집중하는 그의 성격도 한몫했고요.


  회사를 관두자마자 수헌은 꽤 유명한 커피 교육기관에 등록했어요. 커피 내리는 바리스타 과정, 커피 볶는 로스팅 과정을 밟았어요. 원래는 바리스타 시험에 합격해야만 로스팅을 ‘배울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는 서울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기관장을 설득하여 동시에 두 과정을 진행했답니다. 


  김밥, 햄버거, 샌드위치 등으로 점심을 ‘때우며’ 하루 8시간을 볶고, 내리고, 마시고, 버리고를 반복했지요. 로스팅 훈련 과정을 마치면 전문로스터 자격시험이거든요. 이 시험은 일정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시험을 무한 반복해요. 시험이 교육이고 교육이 시험인 로스터자격시험, 길면 1박 2일 동안 진행될 수도 있다네요.


  수헌이 십여 년 가까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울산 집으로 내려왔어요. 바리스타 자격증과 로스터 자격증을 들고서 말이에요. 저는 책방 이름을 선물로 줬어요. 남편 이름 수헌에서 끝 글자를 따 상호로 삼기로 한 거죠. ‘헌이’를 ‘허니’로 말이에요. 

  어머! ‘책방카페, 바이허니’ 상호 탄생 이야기를 하고 말았네요.




  왕버들을 품은 멀구슬나무, 은학


  1989년 봉화중학교에서 은학을 처음 만났어요. 은학은 신규교사, 저는 2년 차였어요. 나이가 동갑인 우리는 이내 친해졌어요. 우리는 봉화에서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며 꽃 같은 청춘을 보냈어요. 

  돌이켜보니 참교육이니 하는 말들이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보낸 삶의 방식이 저절로 그랬으니까요. 시간이 지나고 저도 결혼과 학교일로 바쁘게 지낼 때였어요.  

  서른 살 은학은 여형제가 다섯이나 되는 집의 삼대독자와 결혼했어요. 

  이런, 저의 오빠였어요. 막연한 바람으로 제가 상상하던 일이 딱 이루어진 거예요. 

  

  은학은 모태신앙 기독교인, 부추전 한번 안 부쳐본 막내딸이었어요. 하지만 다달이 닥치는 제사를 무서워하지도 피하지도 않았어요. 

  시부모와도 갈등이야 없었겠냐만 남편 부모 이전에 친구 부모니까 마음이 눅어지더라고 하더군요. 맞아요. 

  제게도 은학은, 올케언니와 상관없이, 청춘을 함께 보낸 친구였어요.

 

  지금 은학은 성주에 살고 있어요. 대도시 생업에 숨막혀 하던 오빠가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은학도 뒤따랐지요. 이제는 학교도 그만두고 딸기 농사를 짓고 농민회 활동도 하고 있어요. 


  친구라서 그럴까요? 생각과 취향은 물론 삶의 큰 흐름도 닮았어요. 

  저는 선생 다음에 책방지기, 은학은 선생 다음에 농사! 


   ‘연리지’는 은학이 일하는 농사공동체 이름이에요. 쌀, 참외, 딸기와 더불어 유기농 세상을 꿈꾸고 있지요. 은학은 새벽에 딸기를 따고 낮에는 유기농 딸기카페 여주인이 될 거예요. 

  제게 딸기와 딸기청을 만들어 보내고 저는 ‘바이허니’ 커피로 답하겠지요. 보나 마나 서로의 공간과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시간이 더 길겠죠. 

  성주와 울산을 잇는 연리지를 타고 사람들도 오가겠지요. 그러다가 큰 물결이 되기도 할 테고요.

 

   울산문수경기장 정원에는 한 나무가 되어버린 멀구슬나무와 왕벚나무가 있어요. 멀구슬나무 구멍에 왕벚 씨앗이 떨어진 게 시작이었대요. 은학과 저는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며 그런 나무가 되었어요.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하나가 된 ‘연리목’ 말이에요. 

  얼핏 보면 은학이 날아든 씨앗 같지만 저는 저와 친정 식구가 통째로 멀구슬나무에 깃든 왕벚나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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