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다음날 아침
서둘러 일어나 기차역으로 갈 준비를 했다.
돌이켜보니 여기서부터 잘못되었다. 작은 가방을 숙소에 두고 온 게 화근이었다.
곧 도착하는 기차역. 뭔가 허전해서 보니 작은 가방을 숙소에 두고 온 게 불현듯 떠올랐다. 짧은 단말마를 외치며 거의 다 와가는 기차역을 뒤로한 채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가방은 무사히 찾았으나 기차는 이미 물 건너갔다. 뒤에 있는 차편을 예약하려 보니 애석하게도 자리가 없다. 이렇게 대책 없이 하루를 버리기는 너무 아까웠다.
에라 모르겠다. 파리에 하루 더 지내며 루브르를 갈까 알아보다가도 이미 너무 늦었다. 우선은 이 무거운 짐도 어떻게든 내려놓고 싶었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을까 생각하다 고민하던 중 버스를 타고 가기로 노선을 틀었다. 바로 터미널을 향해 이동한다. 도착 후 보니 아슬아슬하게 바욘으로 가는 직행버스는 떠났으며 경유 동선을 예매할 수 있었다. 일단 등에 매고 있는 나에 큰 업보 같은 가방을 내려놓고 싶었기에 이 버스에 타기로 한다.
파리에서 르망을 지나 낭트까지 그리고 낭트에서 보르도를 들러 바욘에 도착하는 이 경로는 내 상상 이상으로 고달팠다.
파리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르망 근처에 있는 휴게소를 들러 점심을 먹는다. 한국 휴게소 느낌이지만 당연히 소머리국밥이나 잔치국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역시나 빵의 나라답게 식사거리는 모든 게 빵이다.
진열장에 있는 맛있어 보이는 빵 하나를 주문한다. 이때 주문받으시는 캐셔분이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큰 휴게소 내에 동양인은 나 혼자뿐이다. 이 인간이 여기에 어떻게 왜 온 거지 하는 눈빛과 의사소통이 안 돼서 멋쩍게 서로 웃는 이 분위기. 일단 배는 고프고 빵은 사 먹고 싶으니 긍정의 의사인 Oui(네)를 남발하며 내가 먹고 싶은 빵을 손으로 가리키며 20유로 지폐를 건네준다. 거스름돈을 주면서 뭐라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여행에 프랑스어를 얼마나 알겠는가. 계속 Oui와 merci(감사해요)를 반복할 뿐이다. 아마 빵을 덥혀줄지에 대한 질문이었나 보다. 뒤이어 빵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주는 걸 보면. 그렇게 빵과 음료를 사들고 휴게소 내부가 아닌 외부로 나와 주차장 근처 밴치에 걸터앉아 빵을 먹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빵을 먹는 게 자연스럽다. 적당히 경치가 좋은데 앉아 주섬주섬 입으로 가져간다. 지금쯤 바욘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인데 내가 왜 이름 모를 길바닥에서 빵을 먹고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버스 출발시간이 다 되었다. 그렇게 생에 첫 프랑스 휴게소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시 낭트로 향한다. 낭트에 도착하니 날씨는 스산하고 시간은 벌써 오후 5시가 되었다. 낭트에서 바욘까지 가는 버스는 오후 6시 10분에 오기에 한 시간가량이 비었으며 마침 저녁시간이었기에 근처 식당을 찾아봤다. 아쉽게도 주변에 식당이랄 게 없었다. 빵이라는 카테고리에서 해결해야 한다.
길 건너 맞은편에 작은 카페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조금 큰 빵집이 있었다. 업보와 같은 큰 배낭을 메고서 터벅터벅 빵집을 향해 걸어간다. 물론 작은 가방도 잊지 않고 챙겼다. 가서 보니 화려한 빵들이 즐비했다. 2개만 살 생각이었으나 3+1이라는 꼬드김에 넘어가 2개 추천받아 더 담았다.
커피는 특출 날 게 없었으나 타르트는 그렇지 않았다. 당분이 땡겨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우걱우걱 먹고 나니 어느새 6시가 다 되어간다. 이것 마처 놓치면 오늘은 정말 답이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다행히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포장했던 타르트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마저 먹었다.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드디어 버스가 왔다. 세상 너무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오! 왔다 왔어!’가 절로 나왔다.
어찌 되었든 오늘의 목적지에 갈 수 있음에 감사함이 물씬 올라온다.
뒤이어 버스가 정차했고 건장한 체격의 기사분이 나와 각자의 티켓을 확인했고 뒤이어 나온 작은 체구의 기사분이 행선지를 확인하며 행선지별로 짐을 짐칸에 적재한다.
또다시 시작된 버스여행길… 얼마나 더 갔을까. 해는 넘어가고 시간은 9시가 넘어갈 때쯤 중간에 휴게소를 들렀다. 이후 보르도를 지나 결국 새벽 1시 30분쯤 바욘에 도착했다.
급한 대로 버스에서 바욘에 숙소를 예약했으며 숙소에 미리 양해를 구해 1~2시에 도착한다고 언질을 줘서 다행히도 빠른 입실에 문제는 없었다.
방에 와 대충 짐을 던져두고 씻고 나니 3시. 바욘에서 생장에 가는 기차는 아침 7:30 열차였다.
두 번 다시 열차를 놓칠 수 없다. 아침 8시부터 기차를 놓쳐 발생한 이 고생길. 지나고 나야 추억이지 현재의 나에게는 악몽과 같았다. 다행히 숙소와 기차역 간의 거리는 걸어서 10분 내외의 거리였으며 3시간을 자고 일어나 숙소를 나섰다. 몸이 무거워서인지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다행히 기차는 무사히 탔으며 생장에 도착한다.
순례자의 길 첫째 날
몸은 이미 천근만근이지만 이 맑은 공기와 이색적인 분위기에 취해 기운을 내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으며 순례자의 길을 시작하는 행인들로 보인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있는 목표를 가지고 출발하는 이 길. 모두의 표정이 맑아 보인다.
열차를 내려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니 금세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한다.
애매한 시간에 와서 그랬을까? 오랜 기다림 없이 1분 정도 기다렸고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내 담당 창구에 가니 '봉쥬르' 하며 친절히 인사말을 건넨다.
뒤이어 첫째 날 목적지를 물어본다.
"론세스바예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과 함께 설명을 이어간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쉬운 길과 조금 어려운 길. 두 갈래로 나눠진다. 가는 길 중간에 급수대가 있고 한참을 더 가면 푸드트럭이 있다. 오늘 당신이 가는 이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부엔카미노. “
감사인사를 하며 순례자 여권을 건네받고는 뒤에 있는 저울에 내 가방 무게를 달아본다. 15.2kg. 가벼운 무게는 아니다.
이제 가방을 다시 짊어지고는 집을 떠나는 탕자처럼 문 밖을 나선다.
전날 14시간 넘는 버스이동과 3시간의 취침은 오늘 하루 시작이 쉽지 않음의 확실한 복선이었다.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갈 길이 멀기에 이 마을을 나서기 전 가볍게 요깃거리를 하고 출발에 나선다. 요깃거리는 당연히 빵이다.
포장된 아스팔트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펼쳐진 풍경에 시선을 뺏긴다.
아름다운 풍경은 내 다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고개는 옆과 뒤를 돌아보게 한다. 초록빛 배경 속에서 한 발 한 발 딛는 발걸음조차 싱그럽게 느껴진다.
나폴레옹길을 걸으며 듣기 위해 준비해 뒀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힘차게 나아간다.
명확한 이 길의 시작점. 신나는 행진가와 함께 템포를 높여본다.
오르막길을 꾸준히 올라가다 보니 작은 알베르게가 보인다. 뒤이어 계속 올라가다 보니 식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출발이 늦었고 갈길은 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은 총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처음은 출발할 때 마을에서, 두 번째는 작은 알베르게, 세 번째는 중간에 마주친 식당.
이것들은 나에게 기회였다.
무슨 말이냐면 물을 안 사 왔다. 다시 말해 지금 수중에 물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본 식당을 지나치고 10분쯤 뒤 점점 갈증이 난다. 시작부터 아름다운 풍경에 홀려 잊혔던 미미한 갈증은 점점 강렬하게 다가온다. 계속된 오르막에 점점 입안은 말라간다. 그렇다고 멈춰서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표류된 바닷가에서 바닷물을 마실까 고민하는 딜레마 같은 이 상황. 앞으로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다.
난조 한 컨디션, 타는 갈증, 무거운 짐으로 쏟아지는 땀. 체력이 좋더라도 물 없이는 활동을 이어갈 수 없다. 출발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아까 봤던 식당까지 돌아갈까 고민하는 찰나 멀리서 뭔가가 보인다.
수도꼭지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얘기했던 급수대임이 틀림없다. 등산스틱이 바닥을 찌르는 소리가 빨라진다.
가방에 걸린 컵을 빼들어 콸콸 나오는 물을 감격스럽게 마셨다. 오아시스가 이런 느낌일까 감히 상상해 본다.
600ml 컵에 두 번을 연이어 가득 채워마시니 갈증이 겨우 가신다. 마침 가방에 있는 포카리스웨트 분말을 꺼내 이 수돗물에 타서 두어 번은 더 마셨다. 이제 좀 살겠다 싶어 작은 쿠션방석을 깔고 남아있는 이온음료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다.
절경이다. 조금 전까지는 갈증으로 가려졌던 이 절경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작은 자아성찰을 하며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 거리는 20킬로가 넘는다.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가는 이 길 구글맵으로 거리를 찍어보니 느지막이 가다가는 저녁때나 도착할 거 같다.
생각보다 늦어진 도착 예정시간에 속도를 내서 뛰다 걷다를 반복한다. 어쩌다 보니 앞에 자전거를 끌고 가는 순례자와 한 명과 경쟁 아닌 경쟁을 한다.
가파른 산길에서는 보행자가 빠르고 평지와 내리막길에서는 자전거가 빠르다. 시지프스의 형벌 같은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 이 고행길에 지쳤는지 중간중간 자주 멈춰 쉰다. 서로 간의 앞뒤가 대여섯 번은 바뀌니 서로가 의식이 된다. 그렇게 가기를 수 km 다음 급수지에 내가 먼저 도착해 물을 허겁지겁 마시고 있으니 그 자전거를 탄 순례자가 다가온다. 대뜸 배낭매고 뛰어다니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혹시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그에 대한 짧은 질문을 이어 붙였다.
독일인인 이 친구는 나보다 어렸으며 럭이라고 불러달란다.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서로 힘들어 죽겠다는 앓는 소리를 하던 중 럭은 그렇게 급하게 가다가는 위험할 거라는 충고와 함께 자전거 바퀴 옆 자기 가방에서 빵과 치즈를 꺼내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 10시 전에 먹은 빵 말고는 물로 배를 채우며 여기까지 왔다. (하필 그날 푸드트럭은 장사를 안 했다.)
마트에서 묶음으로 파는 모닝빵 2개와 얇게 썰린 치즈. 눈물 젖지는 않았지만 이 허기짐에 찾아온 빵.
마침 내리막길이 이어져 럭은 빠르게 멀어져 갔다. 혼자 남겨져 급수대 물과 함께 먹는 이 빵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게걸스레 먹다 보니 이제는 정말 부랑자로 녹아들었다.
계속 걷다 보니 드디어 도착했다.
여섯 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시간이 늦어서인지 상태가 비교적 좋은 숙소들은 이미 만실이었다. 조금 아쉬운 데로 오늘 밤 하루 누워 쉴 수 있는 숙소를 찾았고 체크인을 하는 중 럭을 다시 만났다.
여기서 다시 보니 반갑기가 그지없다. 반가운 마음은 서로 악수를 하기 위해 자연스레 손을 올린다.
그렇게 조우의 악수를 하고 훈훈한 결말의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마무리한다.
조금 컨디션이 떨어지는 숙소를 배정받고는 허름한 샤워부스에서 샤워를 마쳤으며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왔다. 몽골 게르에서의 경험은 이런 것도 감사히 느껴진다.
돌아오니 숙소에 사람이 제법 차있다. 알베르게가 다 그렇듯 다인실에 여러 사람이 섞여서 지낸다.
타이완에서 온 부부와 내 또래로 보이는 한국어 교사, 영국에서 온 말 많은 아저씨, 미국에서 온 모녀. 가볍게 서로 인사를 하고 각자의 여정에 대한 정비를 한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던 차 수다스러운 영국 아저씨는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상진이라는 한국인 친구가 있다며 그의 복무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타인의 군 복무 이야기를 영국인에게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흥미로운 상황이나 흥미로울 수 없다. 놀랍다는 제스처 몇 번과 함께 피곤해서 이만 자겠다고 한다.
그리고 맞이한 다음날 아침
여기는 레이트 체크아웃 그런 거 없다. 여섯 시쯤 불이 켜지며 늦어도 9시 까지는 나가야 한다. 서둘러 준비를 마쳤고 리셉션 근처 자판기에서 물부터 두 개 구매 뒤 서둘러 출발한다.
그렇게 다시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