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2
둘째 날
혼자서 한강공원을 부지런히 뛰어둔 보람이 있는 것일까. 어제 컨디션 난조로 힘들었지만 자고 일어나니 걸을만하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맑은 아침. 시원한 새벽공기 그리고 수채화 같은 풍경. 어제와는 사뭇 다른 스타트는 오늘 하루 순항이 예상된다.
론세스바예스를 뒤로하고 터벅터벅 조금 걷다 보니 나오는 작은 슈퍼가 나온다. 고민 없이 들어가 어제 감동을 가져다준 빵을 우선 집어 들고 치즈, 초리조 그리고 하리보 젤리 하나를 사서 나온다. 젤리는 배낭 어깨끈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하나씩 까먹었다. 평소 살찐다고 안 먹던 젤리는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두 개 살걸…’ 입맛을 다시며 계속 걸어 나간다.
오늘은 라라소아냐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애석하게도 일어나 보니 핸드폰 충전이 안되어있어 배터리가 없다. 파리에서부터 시작된 도난 걱정에 충전기를 꽂아두면서 콘센트를 가리려고 세워둔 가방이 문제였나 보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 이정표는 연이어 있지만 불안한 마음에 가야 할 코스 동선만 재빨리 확인한다.
오늘 목적지에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 많고 대체로 길이 완만하다. 어제를 생각하니 이 정도면 너무 감사하다.
아울러 가는 길 목 좋은 곳에 앉아 빵 안에 치즈와 초리조를 넣으며 먹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신이 나서 속도를 낸 결과였을까.
아침 일찍 힘차게 출발한 오늘의 여정은 어제와는 다르게 금방 도착했다.
깔끔하다는 평이 비교적 많았던 알베르게를 가서 우선체크인을 하고 뒤이어 샤워를 하고 나오니 세상이 더 맑아진 것만 같다. 머리를 대충 털어 말리고 얼른 알베르게에서 나가 이 작은 마을을 둘러본다.
작은 마을이었으며, 마을 입구의 계곡 물줄기 소리가 시원함을 가져다준다.
수도권 외곽 이름 모를 산 중턱에 있는 계곡물이 흐르는 작은 마을 같은 분위기. 고요한 마을 분위기와 계곡 물소리만 잔잔히 들려온다.
가볍게 마을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마침 알베르게 맞은편 슈퍼마켓으로 마실 것들을 사러 들어가니 슈퍼마켓 주인으로 보이는 스페인 아저씨가 한국에서 왔냐며 대뜸 묻더니 “안녕하세요” 이후 “가나다라마바사”를 흥얼거리며 반겨준다. 당황스럽지만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반가움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난 뒤 맥주와 감자칩 몇 개를 구매 후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슈퍼를 나왔다.
알베르게에 돌아오니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서 오늘 투숙객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묵었던 알베르게는 석식과 조식이 서비스되었으며 어제 묵었던 숙소에 비하면 좋은 호텔급이었다.
(식사 서비스는 체크인 시 숙박료와 별도로 계산하며 식당 가서 사 먹는 것보다 괜찮은 경우가 꽤 있습니다.)
각자의 국적을 밝히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한국인이라고 얘기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 하나를 건넨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무슨 이유로 이 먼 곳의 순례자의 길에 이렇게나 많이 오냐는 질문은 이날부터 매일 받았다. 예전에 유명한 tv쇼에서 나온 적이 있는 것 같다며 가볍게 넘겼다.
식사 구성은 기본적인 3코스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구성이었고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참치샐러드-미트볼-브라우니로 이어진 식사.
디저트가 아쉬워 사과 하나와 슈퍼에서 샀던 맥주 한 병을 들고 나와 여유로운 디저트를 마저 즐긴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한다. 같은 방을 쓰는 순례객들은 6시가 되어도 다들 일어날 기미가 없기에 조용히 씻고 발 끝을 들고 조심스레 짐을 챙겨 나간다.
나가는 길. 호스트는 어제 신청한 조식을 소풍도시락처럼 가벼운 것들을 담아 포장해서 준다.
가볍게 ”부엔카미노“ 인사를 서로 건네며 알베르게를 나선다.
이른 아침임에도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이 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새삼 잠이라는 게 중요하구나 싶다. 첫째 날만 생각하면 오늘 주어진 이 하루가 감사하기만 하다.
아침 7시에도 어둡던 하늘은 8시가 넘으니 날이 온전히 밝았고 근처 작은 마을에서 고양이와 함께 아침을 나눠먹었다.
그렇게 대여섯 시간쯤 걸었을까. 꾸준히 걷다 보니 어느새 비야바를 지나 팜플로나에 도착한다.
팜플로나에 오는 길. 비야바에 들어서부터는 읍내 분위기가 물씬 풍겨온다. 팜플로나에 다가올수록 도시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작은 마을만 보다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를 보니 이제 스페인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도시 전경부터 스페인의 색감이 확연이 살아난다.
마을에 들어오면서 보이는 멋진 관광지들을 핸드폰에 서둘러 저장해 두고 알베르게에 짐을 맡긴 뒤 서둘러 다시 나온다.
시골과 도시.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이 여정은 새로움의 연속이다. 행색은 시골쥐 같은 모습이었기에 가볍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뒤이어 이 도시를 살펴보기 전 스페인 음식인 핀초스&타파스를 먹어보며 기운을 내기로 한다. 회전초밥집에서 접시를 집어가는 느낌으로 바에 있는 점원에게 손으로 가리키며 '에스테, 에스테 포르 파보르(이거, 이거 주세요)' 하며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주문한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예상이 가는 맛이라 이질적이지 않고 입맛에 잘 맞았다. 개인적인 입맛으로는 프랑스에서 먹었던 음식보다 더 입맛에 맞았다. 게다가 생맥주랑 곁들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예닐곱접시를 비우고 나와 광장으로 가서 가만히 벤치에 앉아 이 도시를 찬찬히 둘러본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와 둘러보니 이 광장의 배경음악의 출처는 구석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버스커의 솜씨였다.
광장에는 서적을 파는 좌판과 한적해 보이는 인원들이 느긋하게 걸어 다닌다. 덕분에 느긋해지는 분위기에 괜스레 책 한 권이 아쉬워진다. 아쉬운 대로 벤치에 앉아 하나의 문장을 읽듯 이 거리의 분위기를 읽었다.
이 책 없는 독서는 이 광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점차 이 원초적인 행군이 적응되어 간다.
다음 날.
6시 기상. 조용히 방을 나와 씻고서 짐을 챙기고서 알베르게를 나간다.
길의 방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도시 군데군데 이정표가 있기에 주어진 길을 따라 차분히 걷는다
9시가 넘어 배가 고파질 때쯤 경치 좋은 곳에 주저앉아 아침을 먹는다.
중간중간 지나가는 작은 마을.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후다닥 바에 걸터앉고는 에스프레소 한잔을 설탕과 함께 털어 넣고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길을 다시 이어간다. 하루 일과는 특별할 것이 없다. 걷고, 먹고, 보고, 자고 이 행위들의 순환.
물론 이 4 단어로 하루 일과 설명을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아쉽다.
어깨에 짊어진 가방은 항상 무겁고 장시간의 육체활동에 옷은 땀으로 젖고 마르기를 반복해 티셔츠가 하얗게 소금기가 올라와있다.
하지만 이 원초적인 행군은 몸이 무거워도 머리는 한없이 가볍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길은 끊임없이 나열되어 있다. 나는 그날그날 내가 걷고 싶은 만큼까지의 길을 걷는다. 물론 걷지 않아도 된다. 모든 여정은 이렇게 나의 의지로 이뤄진다.
즐기면 소풍일 것이고 억지면 고난길인 이 여정은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소풍길이다.
그렇게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테야에 도착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팜플로나에 비해 작은 마을이나 매번 새로운 마을들은 질리지 않게 이 여행을 새롭게 한다. 이곳도 마찬가지. 늦은 점심쯤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저녁때까지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한다.
혼자서 다니는 이 길은 지루할 새가 없다.
다음 날.
에스테야를 떠나 이예기를 지날 때쯤 눈길을 끄는 대장간이 보인다.
지나가는 길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망치질에 집중하는 대장간의 주인으로 보이는 인물은 작업이 한창이다. 순례자 몇 명이 무리 지어 들어가도 눈길 한 번 주지를 않는다. 나도 그 무리를 뒤따라 조심스레 들어가서 그의 작품들을 조용히 둘러보고 나온다.
그의 무심한 망치질에 멋진 작업물들이 만들어진다.
아쉽지만 멋지긴 하나 지금의 내가 감당키 어려운 작품들이다. 이미 가방은 충분히 무겁기에 눈으로 보는 것에 만족한다. 나오는 길 한글로 도장이 쓰여있길래 신기해서 사진도 하나 찍어본다.
대장간에서 아주 조금만 더 걸으면 보이는 유명한 와인 수도꼭지가 있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가방에 연결된 비너에서 컵을 빼들어 와인을 담아본다.
졸졸졸 나오는 와인은 기대만큼 많이 나오지 않았기에 적당히 맛만 봤다. 감질나는 한 모금을 마시고 나오니 와인 수도꼭지 뒤로 펼쳐지는 와이너리와 작은 술 박물관이 보인다. 박물관 입장은 무료였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을 판매했다. 간단히 둘러보고 나왔으며 마침 배가 고파 박물관 앞 목 좋은 곳에서 가방 안에 있는
간식 보따리를 풀어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마저 걸었다.
그 뒤로 로스 아르코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날은 가을날씨. 하늘은 파랗고 대지는 푸르다.
이러나저러나 꾸준히 걷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렇게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