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따른 성서 형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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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지난 수십 년간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재구성과 성서 텍스트의 형성 시기를 둘러싼 논의는, 더 이상 신학 내부의 해석 논쟁에 머물지 않고 고고학·금석학·문학 비평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거대한 학술적 전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한때 윌리엄 올브라이트로 대표되던 이른바 ‘성서 고고학’의 전통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성서 서사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보조 증거로 활용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러한 접근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고고학은 더 이상 성서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성서와 독립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 전환의 중심에 자리한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입니다. 그가 제안한 이른바 ‘저연대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과 발전을 기존보다 훨씬 늦은 시기로 재배치함으로써, 성서 서사가 반영하는 역사적 배경과 성서 텍스트의 형성 시기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성서 형성사를 둘러싼 학문적 지형은 크게 세 흐름으로 나뉩니다. 성서의 역사적 신뢰성을 최대한 옹호하려는 맥시멀리스트, 성서를 후대의 이데올로기적 산물로 보아 역사적 가치를 최소화하려는 미니멀리스트,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성서의 역사성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려는 핑컬스타인과 아미하이 마자르 같은 중도적 학자들입니다.
이처럼 성서 형성사 논의는 더 이상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와 유물, 기억과 권력이 어떻게 얽혀 역사가 구성되는지를 묻는 현대 학문의 가장 치열한 현장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1.
저연대기론 —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이스라엘 핑컬스타인과 닐 애셔 실버먼은 2001년에 출간한 『성서: 고고학인가 전설인가』를 통해, 성서의 초기 서사들이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점의 기록이 아니라 훨씬 후대인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의 정치적·종교적 맥락 속에서 비로소 결정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성서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 층위와 성서 텍스트 사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연대기적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핑컬스타인의 저연대기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제기됩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10세기, 곧 솔로몬 시대의 건축물로 간주되어 왔던 므깃도, 하솔, 게제르의 주요 유적 층위를 재검토하며, 이를 기원전 9세기 오므리 왕조의 산물로 재해석합니다. 이 재배치는 고대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 과정과 정치적 발전을 한 세기 이상 늦추는 결과를 낳았고, 동시에 성서 서사가 반영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요구했습니다.
핑컬스타인에 따르면, 모세오경과 이른바 신명기적 역사서의 핵심 내용은 기원전 7세기 요시아 왕의 통치기에 집대성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다 왕국이 처해 있던 정치적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다수의 북왕국 주민들이 남왕국 유다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유다 사회는 인구 증가와 함께 급격한 사회적·문화적 복합성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다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북왕국의 전통과 남왕국의 전통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민족 서사를 구성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요시아의 종교 개혁과 중앙집권화 정책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전승들이 재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핑컬스타인의 방법론에서 주목할 점은, 고고학적 자료의 객관적 분석을 최우선에 두고 성서 텍스트를 그에 종속시키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는 성서를 고고학적 발견을 설명하기 위한 열쇠로 사용하는 대신, 성서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 유물로 취급합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 서사 역시 실제 청동기 시대의 역사 기록이라기보다는,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 사이의 사회적 현실과 기억을 반영한 문학적 구성물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등장하는 낙타 상인들의 묘사(창 37:25)는 이러한 재해석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낙타의 광범위한 가축화와 상업적 활용은 기원전 1000년 이전의 고고학적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으며, 오히려 아시리아의 패권 아래 아라비아 무역망이 활성화되었던 기원전 8세기 후반의 상황과 더 잘 부합합니다. 이러한 아나크로니즘(특정 시대나 역사적 맥락에 맞지 않는 요소—사물, 사건, 관습 등—가 등장하는 현상)은 족장 서사가 기록된 시기의 역사적 맥락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로 기능합니다.
이처럼 핑컬스타인의 연구는 성서를 부정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텍스트와 유물 사이의 긴장을 정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성서가 형성된 역사적 조건과 기억의 정치학을 보다 정밀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2.
미니멀리스트(코펜하겐 학파) — 톰슨, 렘케, 데이비스
코펜하겐 학파로 불리는 미니멀리스트들, 곧 토마스 L. 톰슨, 닐스 피터 렘케, 필립 R. 데이비스는 핑컬스타인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이들은 성서를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자료로 거의 신뢰할 수 없는 문학적 산물로 간주하며, 그 형성 시기를 페르시아 시대, 나아가 헬레니즘 시기까지 대폭 늦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톰슨은 족장 서사의 역사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아브라함·이삭·야곱과 같은 인물들이 실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후대 공동체의 신학적·철학적 필요에 의해 창조된 문학적 인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미니멀리스트들의 방법론적 핵심은 성서 텍스트와 역사적 실체를 철저히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필립 R. 데이비스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성서가 묘사하는 ‘문학적 이스라엘’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 접하는 이스라엘은 실제 고대 사회의 반영이 아니라, 페르시아 시대 예루살렘의 귀환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구성해 낸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렘케 역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개념 자체가 후대 유대 공동체가 만들어낸 허구적 범주라고 주장하며, 고고학적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 성서의 모든 서사는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서 비평학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자체를 신화로 간주하는 시각은 학계 전반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1993년 텔 단 석비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다소 달라졌습니다. 이 비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집’이라는 표현은 다윗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실존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고, 그 결과 다윗 자체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던 미니멀리스트들의 입지는 일정 부분 약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펜하겐 학파는 여전히 성서 텍스트의 형성 시기를 최대한 후대로 설정하며, 성서를 고대 근동의 실제 역사 기록이 아니라 후대 공동체가 구성한 신학적·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급진적 문제 제기는 성서와 역사 사이의 관계를 다시 묻도록 만들었고, 오늘날 성서 형성사를 둘러싼 논의 지형을 한층 더 복잡하고 긴장감 있게 만든 핵심 요인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3.
수정 고연대기 — 아미하이 마자르
핑컬스타인이 제기한 저연대기론에 대해, 학문적으로 가장 신중하고도 균형 잡힌 응답을 제시한 인물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아미하이 마자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자르는 핑컬스타인의 문제 제기를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일부 연대 하향 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기원전 10세기의 유다와 이스라엘을 미약한 촌락 사회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마자르가 제시하는 이른바 ‘수정 고연대기’의 핵심 주장은 이렇습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의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미 일정 수준의 사회적 분화와 행정 조직을 갖춘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해 있었으며, 모든 발전을 기원전 9세기 오므리 왕조로만 돌리는 것은 고고학적 자료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근거가 바로 텔 레호브(Tel Rehov) 발굴에서 확보된 정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자료입니다. 마자르는 이 데이터를 통해, 핑컬스타인이 기원전 9세기로 일괄 비정했던 일부 유물들이 실제로는 기원전 10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에 걸쳐 형성되었음을 논증합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9세기냐 10세기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두 세기가 겹쳐지는 과도기의 역사적 실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방법론적으로도 마자르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그는 성서 텍스트와 고고학을 경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증언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명기적 역사가 후대에 편집·재구성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내용을 후대의 허구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텍스트 안에는 왕실 연대기, 행정 기록, 그리고 오랜 구전 전승에서 비롯된 실제 역사적 기억들이 층위적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마자르의 판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므깃도와 하솔에서 발견된 대형 건축물들 역시 재검토합니다. 마자르는 이 유적들을 반드시 솔로몬 단독의 산물로 단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핑컬스타인이 제안한 것처럼 전부를 기원전 9세기로 늦추는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솔로몬 시대에, 또 일부는 그 직후 세대에 걸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보다 유연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결국 마자르의 중도적 입장은, 핑컬스타인의 급진적인 역사 재구성과 전통적 맥시멀리스트들의 무비판적 조화 시도 사이에서 오늘날 고대 이스라엘 고고학의 주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입장은 단정적인 결론보다 증거의 누적과 조심스러운 해석을 중시하며, 성서와 고고학 사이의 대화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인 학문적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맥시멀리스트 — 키친, 호프마이어
핑컬스타인과 미니멀리스트들의 거센 문제 제기에 맞서, 성서의 역사적 신뢰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학자들을 흔히 맥시멀리스트라고 부릅니다. 이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케네스 키친과 제임스 호프마이어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대 근동에서 출토된 방대한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증거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성서의 주요 서사들이 기원전 2000년대와 1000년대의 실제 역사적·사회적 정황을 상당히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케네스 키친은 그의 저서 『구약의 신뢰성』에서 성서 본문에 나타나는 법전의 형식, 조약과 계약의 구조, 인명과 지명의 형태 등을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각기 대응하는 고대 근동의 시대적 관행과 일관되게 부합한다는 점을 통계적·비교사적 방법으로 입증하려 합니다. 그의 논지는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성서 텍스트를 동시대의 문헌 자료들과 나란히 놓고 검증할 수 있는 역사 자료로 다루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맥시멀리스트들이 특히 공을 들이는 영역은 출애굽과 정복 서사입니다. 제임스 호프마이어는 이집트 나일 델타 지역의 발굴 성과를 근거로, 기원전 2천년기 후반 이집트 내 셈족 계열 인구의 존재와 국경 관리 체계가 성서가 전하는 출애굽 이야기의 지리적·행정적 배경과 충분히 조응한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연구는 성서 이야기가 전혀 허구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기억과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맥시멀리스트들은 성서 텍스트를 고대 근동 세계의 중요한 1차 사료로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동시에 이들은 고고학적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바로 역사적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료의 한계와 해석의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성서와 고고학 사이의 긴장을 단순한 대립 구도로 환원하기보다는, 상호 보완적 탐구의 장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문서 가설과 편집 비평의 변화
성서 형성사를 둘러싼 논의는 이제 단순히 고고학적 연대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를 넘어, 텍스트 내부에 남아 있는 층위와 편집의 흔적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라는 편집 비평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땅속에서 나온 유물만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하나의 ‘고고학적 현장’이 된 셈입니다.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문서 가설(JEDP)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고전적인 문서 가설은 J와 E 문서를 통일 왕국 시기, 곧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산물로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은 이러한 전제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른바 ‘고전적 J·E 문서’는 초기 왕국의 산물이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이 정치·경제적으로 번영하던 시기에 형성된 북쪽의 전승들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전승들이 기원전 722년 북왕국 멸망 이후 유다로 유입되어, 기원전 7세기 요시아 시대의 신명기적 역사 편집(DtrH)을 위한 중요한 기층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J와 E를 서로 분리된 문서로 상정하기보다, 북이스라엘 전통의 집합적 기억이 남유다의 정치·신학적 프로젝트 안으로 흡수되는 과정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문서 가설은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사적 맥락 속에서 재배치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재구성은 제사장 문서(P)의 연대 문제에서도 더욱 두드러집니다. 전통적으로 P 문서는 바빌론 유배 이후, 곧 성전이 무너지고 제의가 붕괴된 상황에서 탄생한 신학적 재구성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핑컬스타인과 토마스 뢰머를 비롯한 최근 연구자들은 이 도식에 중요한 수정을 가합니다. 그들은 유다 왕정 후기의 행정 조직, 성전 중심 제의, 그리고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고려할 때, P 문서의 핵심 요소들—계보, 제의 규정, 성소 중심성—이 이미 왕정 말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유배기는 완전한 창작의 시점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전통이 정리·체계화된 결정적 편집의 국면이라는 것이지요.
반면, 코펜하겐 학파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스트들은 이 모든 층위 구분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합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J, E, D, P라는 구분은 후대 학자들의 분석 도구일 뿐이며, 실제로는 페르시아 시대 이후 예루살렘의 신학 서기관들이 과거를 통합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이 입장에서는 문서 가설 자체가 역사적 실체를 반영하기보다, 후기 담론의 산물로 간주됩니다.
결국 오늘날의 성서 형성사 논의는, 문서 가설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폐기할 것인가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습니다. 고고학, 편집 비평, 사회사적 분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이제 성서를 단일한 저작도, 순수한 허구도 아닌, 여러 시대의 기억과 권력이 층위적으로 퇴적된 텍스트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복합성이야말로, 성서가 여전히 해석의 장으로 남아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6.
문자 사회의 출현과 문해력의 확산
성서가 언제 기록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핑컬스타인은 무엇보다 쓰기 사회가 언제 성립했는가라는 문제에 주목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유다에서는 행정 문서나 문학 텍스트를 체계적으로 생산할 만한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즉, 글을 쓰고 보존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기원전 8세기 후반, 유다가 아시리아의 조공 체계에 편입되면서 급격히 달라집니다. 이 시기부터 도편 비문, 인장, 불라와 같은 금석학적 자료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데, 이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국가적 행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서기관 체계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문해력을 갖춘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고, 기록과 편집이 가능한 제도적 인프라가 갖추어졌다는 신호입니다.
핑컬스타인은 바로 이 지점을 성서 텍스트가 본격적으로 기록·편집될 수 있었던 ‘삶의 자리(Sitz im Leben)’로 봅니다. 반대로, 바빌론 멸망 이후의 페르시아 시대 예루살렘은 인구가 수백 명 수준으로 급감했고, 경제적·행정적 기반도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조건에서는 방대한 성서 전통을 조직적으로 기록하고 편집할 전문 서기관 계층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따라서 반복되지만,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은 성서의 주요 형성 시점을 페르시아 시대가 아니라, 기원전 7세기 유다 왕정 후기로 끌어올립니다. 이 주장은 성서 형성의 중심축을 유배 이후에서 왕정 말기로 이동시키며, 성서를 이해하는 역사적 틀 자체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하는 겁니다.
※ 이 지점에 대해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 윌리엄 슈니더윈드(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의 견해와 비교해 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슈니더윈드는 고도로 학습훈련된 서기관 집단에 의해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후기 철기시대에 성경이 집필되었다는 학설을 펴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은 링크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7.
고고학적 접근
성서 형성사를 비교·정리할 때, 결국 판단의 분수령이 되는 것은 구체적인 발굴 현장의 데이터입니다. 이 데이터야말로 각 학파의 가설을 검증하는 가장 냉정한 시금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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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깃도, 하솔, 게제르 — 솔로몬 or 오므리 시점
전통적으로이 세 도시는 열왕기상 9장 15절에 근거해 솔로몬의 요새 도시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가엘 야딘은 이 세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6방 성문의 동일한 설계를 솔로몬 시대의 중앙집권적 행정력의 증거로 해석했습니다.
vs. 그러나 핑컬스타인은 이 성문들이 속한 층위의 도자기 양식이 기원전 9세기 북왕국 오므리 왕조와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를 솔로몬이 아니라 오므리와 아합 시대의 건축물로 재비정했고, 이 해석은 다윗·솔로몬 시대를 고고학적으로 ‘비어 있는 시기’로 만들며, 대신 북왕국 오므리 왕조를 이스라엘 국가 형성의 실질적 출발점으로 부각시키는 저연대기론의 핵심 근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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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벳 케이야파와 초기 유다 국가의 실체
이 논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례가 바로 키르벳 케이야파입니다.
요시 가르핑켈이 발굴한 이 요새 도시는 기원전 10세기 초반으로 연대가 올라가며, 감람석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기원전 1020~980년을 가리킵니다. 이는 다윗 시대에 이미 조직화된 정치 체계와 초기 쓰기 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는 주장입니다.
vs. 핑컬스타인은 이에 대해 케이야파가 유다의 도시가 아니라 북왕국의 전신적 세력이거나, 혹은 블레셋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 집단일 수 있다고 반론하며 논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단순한 연대 문제가 아니라, ‘국가’라는 개념을 어디서부터 적용할 것인가라는 정의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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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크기와 인구 논쟁
마지막 쟁점은 예루살렘의 규모와 인구입니다.
맥시멀리스트들은 기원전 10세기의 예루살렘을 다윗과 솔로몬 제국의 중심 수도로 상정합니다.
vs. 그러나 핑컬스타인의 조사에 따르면, 이 시기의 예루살렘은 산간 지역의 소규모 정착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성서가 묘사하는 정치·종교적 대도시로 성장한 시점은 히스기야와 요시아 시대, 즉 기원전 8세기 후반 이후입니다. 이러한 인구 통계학적 접근은 성서의 화려한 묘사가 동시대의 기록이라기보다, 후대 편집자가 투영한 이상화된 기억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8.
정리를 마무리하며...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성서 형성사에 대한 비교 연구는, 고고학적 발견이 문헌 비평과 결합할 때 역사가 어떻게 새롭게 재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한편에서는 미니멀리스트들이 성서에 내재한 문학적·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드러내고,
- 다른 한편에서는 맥시멀리스트들이 고대 근동의 역사적 연속성을 지키려 애씁니다.
- 그 사이에서 핑컬스타인과 아미하이 마자르 같은 학자들은, 이념이 아니라 고고학적 데이터의 엄밀한 분석을 통해 성서 텍스트 이면에 놓인 실제 역사의 층위를 차분히 밝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서 형성사는 더 이상 고전적인 문서 가설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철기 시대의 인구 이동, 토기 양식의 변화, 쓰기 문화의 확산, 그리고 주변 제국들의 흥망성쇠가 서로 얽히며 만들어 낸 복합적 역사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핑컬스타인의 저연대기론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성서 연구가 고고학적 실증과 결합하여 한 단계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지평으로 나아가게 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서의 문장 속에 고정된 박제가 아니라, 매일같이 발굴 현장의 흙더미 속에서 다시 질문되고, 다시 해석되며, 끊임없이 새로 쓰이는 살아 있는 대화의 현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무엇이든, 고정된 것으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결코 진리를 향한 올바른 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과의 대화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아는 바가 끊임없이 갱신되고, 조금씩이라도 끊임없이 진리에 수렴해 가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참고 자료]
1. 간추린 이스라엘 역사(아브라함에서 에스라까지), 윌리엄 F. 올브라이트, 2012, 기독교문서선교회
2.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 이스라엘 핑컬스타인, 2002
3. 성서비평 방법론 리뷰, KEN brunch
4. 신의 발명(토마스 뢰머), KEN Brunch
5. 오경 형성 이론의 역사적 변천 및 주요 학설 정리, KEN Brunch
6. ⟪자료비평⟫의 시작점 이해(율리우스 벨하우젠), KEN Brunch
7. 그 책은 누가 썼을까? (리처드 엘리엇 프리드먼), KEN Brunch
8. 신-문서설 고찰 (제프리 스택커트), KEN Brunch
9. 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윌리엄 슈니더윈드), KEN Brunch
10. 제2성전기 유대교의 지혜 담론과 토라 (권지성), KEN Brunch
11. [브런치북]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서, KEN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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