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덜컥, 서른여섯(3)

by 갑자기 흰수염

6개월


퇴사 일주일 전 은행에서 목돈을 대출받았다. 퇴사 대비용이 아닌 공공임대주택 입주비용이었다. 대출 상담을 받으면서 서울까지 출퇴근 경로를 고민하고 있었고 단기간에 빚을 청산하겠다는 야심찬 포부까지 있었으니 매달 고정 지출로 몇 백만원의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숨만 쉬고 사는 값으로는 비싼 편이었다. 차분하게 앉아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반년도 안됐다.

‘그래도 지금 죽어도 빚은 없겠구나’

입주 보증금과 내 소유의 자동차를 팔면 몇 백만원은 남았다. 일순간 스쳐지나간 죽음을 생각하면서 돈 문제가 먼저 떠올랐으니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는 체제에 아주 잘 적응한 어른인가. 아닌 것 같았다. 돈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으나 어떤 모습인지 모른다. 돈을 좇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데 어떤 방식인지 모른다. 당당해져 볼 기회나 좇지 않을 상황이 주어진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무작정 대학을 졸업했다. 남들 다하는 스펙 쌓기, 취업스터디를 해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하루를 버티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오늘이 쌓이면 알바비가 들어왔고 그저 이름만 달라진 달의 똑같은 오늘이 다가왔다. 꿈은 없었다. 학교에 잘 가지 못해 학기 말이 되면 교수실을 전전하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야 했고 “왜 이제야 왔느냐”며 많은 도움을 받곤 했다. 현실적 도움을 받으면서도 가장 듣기 싫었던 말 중 하나는 공무원을 준비하란 조언이었다. 교수들이 보기에 허덕거리며 사는 내가 투자·기회비용 대비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삶의 과정이었으리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이 죽도록 듣기 싫었다. 막연하게 틀에 박힌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공무원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활 내내 벗어날 수 없는 오늘들에 점차 숨 막혀하고 있던 때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갇혀 있는 삶이란 느낌이 싫었던 것 같다. 여러 교수들의 진심어린 조언을 뒤로 하다보니 어느덧 졸업이 다가왔다. 덜컥 공포가 엄습했다. 그나마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오늘을 버티기 위해 내 삶을 유예할 수도 있었다. 버거운 현실에서 대학생이라는 위치가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해주기도 했다. 유예하고 미룰 수 있었던 유일한 나의 울타리가 사라지려하니 벌벌 떠는게 당연했다. 하지만 졸업식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확고한 생각이 마음에 뿌리내렸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매몰차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돈은 모르겠다, 월세도 모르겠다, 공과금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이렇게 살지 않겠다’


어렴풋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서른여섯까지 해왔다. 어느덧 월세는 월급에서, 공과금도 월급에서 나가는 게 익숙해졌지만 알바로 대학생활을 채운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나이는 때 되면 앞으로 나아갔지만 돈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가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어디냐’며 나를 설득하고 돈을 보려하지 않았다. 때론 따라갈 수 없는 연봉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의연한 척하기도 했다. 내가 빌릴 수 없는 대출 한도에 도달한 ‘신용’있는 동년배들이 사준 술을 얻어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내가 돈을 따라가면 안돼, 돈이 나를 좇게 하는거야’라고 되뇌이기도 했다. 정작 좇게 하는 방법이 뭔지 몰랐다. 내가 적게 번다며 만날 때마다 밥을 사는 친구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돈 앞에 당당한 것인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살아갈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가고 나는 희미해져가는 듯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뿌듯함으로 여태껏 왔는데 언젠가 이 직업으로 이룩하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마주하니 덜컥 무서워졌다. 흐릿해진 나와 달리 돈은 언제나 선명했다. 칼끝을 목에 겨눈 체 내게 남은 시간은 6개월이라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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