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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서른여섯(2)

by 갑자기 흰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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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나왔으니 찾아온 게 아니라 찾아간 것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밤을 새운 아침, 덜컥 내지르듯 부장에게 회사로 간다는 문자를 보냈다. 어떤 끈이든 사회와 관련된 것은 다 놓고 싶었다. 환승역 전철을 기다리는 플랫폼에 선 사람처럼 퇴사를 해야 한다는건 서른여섯이면 충분히 알 나이다. 난 아무런 계획도 없이 퇴사를 결정했고 회사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는 건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길거리를 걷는 난 싱숭생숭하지도, 시원섭섭하지도 않았다. 빛나는 내일을 꿈꾸지 않았고 굴레를 벗어났다는 작은 위로만 있었다. 쳇바퀴 도는 하루가 지루하고 숨 막히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 내 육감(six sense)이 ‘이제는 내려오라’고 말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조용히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일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서울에 구한 나의 방. 집이라고 하기엔 반겨줄 사람도 없고 거실, 주방, 안방 구분도 없는 직사각형 잠자리. 그곳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퇴사 한 달 만에 본가 근처로 거주지를 옮겼다. 방 두개와 거실이 있는 공공 임대아파트. 혼자 쓰기 널찍한 곳으로 옮기니 ‘집’이라고 할 법하지만 반겨주는 문을 열 수 없으니 그냥 거주지가 바뀌었을 뿐이다. 퇴사를 모르는 엄마는 아들이 일하고 돌아와 넓은 방에서 쉴 수 있다며 좋아하셨다. 더 넓어진 공간에서 나는 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은 떼어내려 할수록 거칠게 들러붙어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한 달 후에야 퇴사 소식을 접한 선배, 동료, 관계자들의 카카오톡 메시지와 전화가 이어졌다. 그 누구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어떤 설명을 해야 할지, 어떤 말로 그들을 마주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만둔 탓에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이 그나마 할 수 있는 대꾸였지만 아무도 ‘그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 같지 않았다.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는 애매모호하고 예측 불가능한 ‘그냥’이라는 말보다는 살아내야 하는 ‘지금’과 살아가야 하는 ‘내일’이 있어야 했다. 멀어져만 가는 성공과 안정이 있을 것 같은 정상을 향해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올라가야 하는 나이였다.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습관이 어느새 정상을 보지도 않고 고갤 떨구고 힘겨운 발걸음만 내딛는 하루에 속해 있어야 보통 사람 축에라도 들 수 있는 시기라고 해야하나. 걸려오는 전화와 문자 메시지는 한동안 고역이었다.


나의 일방적 단절을 궁금해마지 않던 한 친구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나마 오랫동안 나의 거취를 궁금해 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온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적이 익숙한 나만큼 친구의 공백이 익숙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녀석이 어느 날 카카오톡 메시지로 자신의 계좌번호를 찍었다. 뜬금없는 친구의 문자가 궁금해 확인할 수밖에 없었고 친구의 말인즉 내 나이에 아무 계획없이, 구직활동도 안한다는 건 로또 당첨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우리 집도 어렵고 너희 집도 어렵지만 친구를 위해 천만원만 부치라는 것이었다. 헛웃음과 진짜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나도 설명할 수 없었던 퇴사 이유를 간단하게 정리해냈다. 현실적이지 않은 설명은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없는 나이. 내 친구이면서 두 아이의 아빠인 그가 나의 퇴사 이유를 생각하며 어느 쪽에 더 가까웠을까. 낡아가는 지갑 속에 사둔 꼬깃꼬깃한 로또를 생각하며 토요일까지 견디는 쪽일까, 고시에 연거푸 낙방해도 사주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공부에만 전념했던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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