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이면 한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우체통 앞에 선다. 그리고 한 통의 편지를 넣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선다. 그 편지는 돌아가신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여보, 오늘은 된장찌개를 혼자 끓였어. 많이 짰어. 당신 음식 솜씨가 그리워.” 우체국 직원은 그 편지를 따로 모아두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하더라. “마음이 닿을 수도 있잖아요, 그쵸?”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 내 마음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할머니는 세상에 없지만, 할아버지 마음속엔 여전히 함께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편지를 썼겠지.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글, 그게 사랑이고 기억이니까.
사람의 공감은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 한 편에서 시작된다. 누군가 내 글에 공감하고, 이해해주길 바란다면 그 시작은 늘 ‘이해’에서 비롯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쓰는 일도 그렇다. 진심을 전하고 싶다면, 먼저 마음을 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요즘 나는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자주 들여다본다. 아이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른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틀에 불과했다. 아이 마음속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우주 같은 세계가 있었고, 그것은 가만히 귀 기울일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에는 아이가 실수하면 바로 지적부터 하고, 훈계부터 시작했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 한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먼저 이해해줘야 어른답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 ‘공감’하면 스레드(Threads)를 빼놓을 수 없다. 메타가 만든 텍스트 기반 SNS, 트위터보다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로운 공간. 거기선 팔로워 수보다 공감이 알고리즘을 움직인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이 자기만의 진심을 짧은 글에 담아 올린다. “나만 이런 거 아니었구나.” 그 말을 듣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요즘엔 그 마음이 도착하는 방식도 새롭다.
스하리, 반하리. 스레드 하트와 리포스트, 그리고 그에 대한 조용한 보답. 말 없이 마음을 주고받는 방식이 약속처럼 오고 간다.
나도 해봤다. 반말로 짧은 글을 썼고, 누군가는 하트와 리포스트로 화답해줬다. 기술은 점점 정교해지지만,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공감’이라는 아날로그 감정이었다. 우체통 앞에 남겨진 할아버지의 편지처럼, 나의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글을 쓰는 일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믿는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조용히 마음을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