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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2025.12.5 (11m 13d)

by 슈앙

양갱이 낳기 2주 전, 마지막 출근길은 대폭설이었다. 수원에서 마곡으로 가는 통근버스는 6시 40분에 출발하고 걸어서 30분 거리라 매일 남편이 태워 줬었다. 그런데 폭설로 도저히 차로 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파트 단지는 이른 새벽이라 제설작업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입구까지 가기도 벅찬 지경이었다. 마지막 날만 아니면 재택 하는 건데 어쩔 수 없이 꼭 출근은 해야 했다.


우리는 결국 걸어가기로 했다. 5시 30분쯤에 출발했다. 신발은 등산화를 신었다. 만삭의 몸으로 뒤뚱거리며 남편 손을 꼭 잡고 한발 한발 걸어갔다. 어두운 새벽길, 전깃줄에 쌓인 눈은 무거워져 후두둑 떨어지는데 정글을 헤쳐 가는 기분이었다. 동네 유명 베이글 가게가 있는데 이 폭설에도 새벽부터 오픈했다. 반가운 마음에 우리는 아침식사로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서 먹었다. 주인은 이 폭설에도 와줘서 고맙다고 수제 과자를 선물로 줬다. 갓 구운 베이글과 수제과자는 정말 맛있었다.


누군가 우리를 보면 미련하기 그지없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재밌었다. 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다. 남편과 나는 서로 의지하며 눈밭을 헤쳐나가는데,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함께 하는 미래가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올 겨울 첫눈이 내렸다. 양갱이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었다. 양갱이에겐 처음 눈을 보는 순간이다. 물론 신생아 때도 눈이 오긴 했지만 그땐 기억은 둘째치고 시력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눈을 봤다고 할 수 없다. 오늘 내린 눈이 양갱이가 보는 첫눈일 것이다. 무의식 속 어느 기억 한편에 남는 순간이길 바랐다.


옷을 단단히 입히고 '양갱아~ 눈 보러 가자~'고 몇 번을 말하면서 밖을 나갔다. 최근에 코감기라 밖에서 노는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오랜만이었다. 생각보다 살을 에는 수준의 추위는 아니었다. 늦은 오후긴 해도 해가 있어 따스했다.


걷지도 못하는 양갱이를 들어 눈을 밟아도 보게 했다. '이게 눈이야~'하면서 손에 쥐여주기도 하고 볼에 살짝 갖다 대기도 했다. 나는 신이 나서 양갱이에게 눈을 소개하는데 양갱이 반응은 뜻뜨미지근하다. 한 번 만지고 나선 차가운지 또 만지려 하지 않았다.


도망 다니는 양갱이 붙잡아가며 기저귀에 바지에 패딩 입히고 신발도 겨우 신겨서 나왔는데, 양갱이 반응은 '어~ 알아~ 눈.. 나 태어나서도 몇 번 봤어~' 이런 느낌이었다. 그 보단 오랜만에 정자 가서 신난 거 같았다. 눈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 내년에는 같이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고 그러자~ 그러면 재밌어라 하겠지.. 나만 설쳐댄 짧은 외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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