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과 직장간 소요 시간은 지하철 30분과 환승후 버스 2정거장이다. 보통의 직장인처럼 9시까지 출근이지만 10분 정도 일찍 도착하려 한다. 그날은 미처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조금 늦게 집에서 부랴부랴 나왔다. 지하철은 변덕이 없어 늘 제시간에 맞춰오고 제시간에 바래다주지만 버스는 변덕꾸러기라 오늘 같은 날엔 늘 긴장해야 한다. 다행히 지하철은 맞춰 탈 수 있었다. 직장 부근까지 다와 버스만 제 때 갈아타면 늦지 않게 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짝지근한 믹스 커피 한 잔을 여유롭게 마시며 하루를 시작해야 일도 잘 풀리는 법. 그런데 그날따라 목 빠지게 기다리던 버스가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어느새 정거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미간을 찌푸린 사람들은 다들 직장인이겠지. 버스는 변덕 꾸러기라는 것은 알고 있는 터였지만 그날따라 변덕이 최고점에 이른 것이다.
'까딱하다간 지각을 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아직 지각할 짬까지는 안됐는데...'
'출근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몰래 자리에 앉아야 하나...'
8시 59분과 9시의 온도는 냉탕과 온탕 차이다. 8시 59분까지는 사무실이 왁자지껄해서 소리 소문 없이 착석할 수 있지만 9시가 되면 무언의 약속이라 한 듯 조용해지기 때문에 늦은 등장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버스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행히 지각은 면하겠구나. 믹스커피 한 모금의 여유 정도까지는 가질 수 있겠구나. 그런데 웬걸 거북이 마냥 느릿느릿 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짜증이밀려왔다. 이 귀한 출근 시간에 저렇게 천천히 오면 어쩌자는 것인지. 장롱면허인 나도 저것보다는 빠르게 액셀을 밟겠다며 혀를 차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거북이 같은 버스를 선두로, 밀린 택배처럼 버스들이 줄지어 정류장으로 왔다. 틱! 버스카드를 찍으며 거북이 운전기사님을 힐끗 보는 데 나보다 앳되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버스 기사님은 늘 40대 이상이신 분들만 봐와서인지 내 또래의 사내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스치듯 본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아, 버스 운전기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겠구나. 짜증은 동정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서투르게 배워 왔다. 말과 걸음 그리고 사랑이 그렇다. 옹알이와 넘어짐과 이별을 겪고 나서야 제법 능숙해진다.여전히 능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초등학생때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생각난다. 못하면 수비수부터 시작하는데 수많은 헛발질 덕에 실력이 늘 수 있었고 공격수가 되어서도 수많은 똥볼 덕에 골잡이가 될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아직 몰라서 서툴게 배워나가야 하는 것 투성이다. 업무가 바뀔 때면 또다시 신생아가 된 것 같고 두려움 투성이다. 근거 따질 새도 없이 전임자의 말 하나하나가 경전처럼 절대적이다. 왜 사수랑 부사수가 썸이 생기는지 알겠다.하나를 알려줘도 둘을 알아듣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타인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나를 알려줘서 하나만 제대로 알아들어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아직도 운전이 서툴러 후진주차가 두렵고 재테크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부딪히는 모든 것들을 서투르게 배워나가다 어느샌가 능숙해져 있겠지.
나의 서투름과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신입 버스 기사님에겐 아주 기다란 버스에 수십 명을 태우고 도로 위를 달리는 일이란 서투르고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나처럼 늦은 출근길에 나선 이들의 눈총도 뒤통수에 따갑게 느껴지겠지. 부산에서 운전하기가 쉽지 않은데 버스 운전은 오죽할까. 경사는 무척 가파르고 운전자들은 맹수처럼 사납다. 조금은 느리지만 그는 안전히 자신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백점일 수는 없으니까. 조심스럽게 밟고 있는 액셀도 언젠가는 능숙하게 밟게 되겠지. 지금은 서툰 운전기사지만 시간이라는 보약을 먹고 베테랑 운전기사가 되겠지. 버스에서 하차할 때 작게나마 마음속으로 응원을 건넸다.
1점씩 채워가면서 100점짜리 운전기사가 되시기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쉽게 초조해하고 남을 힐난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보고 있으니 서툴러서 답답한 마음에 짜증이 난 적이 왕왕 있었음을 고백한다. 축구를 할 때 허우적 대던 친구에게도 그랬고, 카페에서 손이 느렸던 알바생에게도 그랬다. 대게는 그냥 넘어가지만 내가 초조하고 긴박할 때는 자동 모드처럼 짜증이 솟았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던데 큰일이다. 다행히 이번 일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버스 기사님이 거울 속지난 날의 서툴렀던 내 모습처럼 보여서그때의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대학교 신입생 때 첫 알바로 학교 행정실에서 근로를 한 적이 있다. 아침 회의 준비로 스테이플러로 찍은 여러 장의 서류를 몇 부 복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복사기를 처음 써보는 나는 입력값 그대로 스테이플러 심이 박힌 채로 서류를 복사기에 넣었던 기억이 난다. 원본이었던 서류는 찌그러져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미숙했던나를 힐난하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서투른 사람에게 쉽게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야지. 내 마음이 초조하다고 해서 마음의 각을 뾰족히 세우지 않아야지. 이제는 많이 마모돼서 닳을 때도 됐다(?). 이번 출근길도 따지고 보면 내가 좀 더 서둘렀으면 되는 일인데.한번쯤 늦는다고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남에게도 나에게도 조금은 더 여유를 내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