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웠던 바람이 제법 따뜻하게 느껴지고 두꺼웠던 겉옷이 어느새 얇은 가디건으로 바뀐 계절이 되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씨앗을 틔울 준비를 하듯 나도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준비라는 말이 거창할 수 있지만 조금은 단단해지자는 마음으로 언니네에서 나와 독립을 하게 됐다.
크지 않은 집이었지만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퇴근하면 언제나 초등학생 조카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쩍하던 시간들은 혼자만의 고요로 덮여졌다.
처음 이사하고는 퇴근 후 현관문을 열고 불이 꺼진 깜깜한 집에 들어설 때면 그 어두운 황량함에
화들짝 놀래기도 하고 차가운 서늘함을 느껴서 더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만의 공간을 갖고
그 공간을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다는 건 생각보다 더 안정감과 아늑함을 느끼게 했다.
작은 소파에 기대앉아 와인 한잔을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시간은 내게 가장 큰 에너지를 채워주는 시간이었다.
조용한 저녁시간의 집에서 그렇게 나는 외롭다가도 편안하다가도 슬프다가도 행복했다.
혼자만의 공간을 가짐으로써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짜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주말에는 훌쩍 근처 소도시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맛집과 카페를 찾아다니며
혼자인 시간들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길고 긴 밤도 외로움에 잠식되지 않을 정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에 만날 누군가와는 건강한 연애를 하기 위해 나는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노력이 가상 해서였을까. 어느 날 회사 친구가 좋은 사람이 있는데 만나보겠냐고 물었다.
“내 남자친구 친구인데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자기 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야.
정 부담스러우면 그냥 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편하게 만나봐.”
나의 이혼 경력까지 모두 알고 있는 친구는 내가 어떤 망설임을 갖고 있는지 눈치챘다.
“그럼, 그분한테 내 이혼사실 먼저 얘기해 줄래? 그게 더 편할 것 같아.”
처음부터 내 상황을 오픈하고 편하게 만나고 싶었다.
지난번 처럼 많은 감정을 쌓은 후에 죄책감에 고해성사하듯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곧 식사 자리를 만들었고 나의 상황까지 얘기했음에도 그분은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내 인생 최고로 매운맛 연애가 기다리고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