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목차: AI와 독자]
◑ Part 1. AI와 창작
(생략)
◑ Part 2. 작자에서 독자로
♬ 밀려난 예술가와 아마추어 예술가
♬ 아직도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
♬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은 것, 놀자와 살자
♬ 인생에서 누구나 하나쯤은 쓸 소재가 있다
♬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여 깊이 읽어내기
♬ 대전환의 특이점 시기 이후
♬ 읽을 수 없는 너무 많은 읽을거리
♬ 읽기를 넘어 믿기, 때로는 미끼
◑ 에필로그
[소개글]
-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몽상적 산문입니다. (생략, 더보기)
- 이미지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여기서는 AI 예술이 본질적으로 가닿기 어려운 지점으로 첫째 참여하는 놀이의 속성, 둘째 경험하는 삶의 속성을 든다. 공연예술과 초고가 미술 분야, 2차 창작과 에세이 등을 예시로 들면서 그동안 번외의 현상이었거나 주변적 미덕이었던 요소를 조명한다.
♬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은 것, 놀자와 살자
AI가 해도 무의미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러면 우선 AI예술이 제국주의적으로 뻗쳐오더라도, 살아남는 인간 예술이 뭐가 있을지 궁금해지더라고요. 특이점에 이르면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시간차 덕분에 조금 더 오래 지속할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죠. 이미 하나는 말했어요.
영화에서 인간 배우의 세밀한 연기를 두 시간 동안 자동으로 생성하는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다고요. 설령 할 수 있더라도 비용의 효율성 문제가 발생하거나, 인간 배우를 지지하는 팬층을 아우르지 못하고요. 그 지점에선 AI의 원작을 통하여 AI의 일정에 따라 인간 감독이 조율하면서 영화를 효율적으로 제작하려 하겠죠. 그래도 인간이 할 일이 있다는 거죠. 그 주도권을 AI에게 넘기더라도요.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몽상했어요. 공연 예술은 어떨까요? 특히 음악의 라이브 공연이요. 전 아무래도 아바타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지 못해서 그럴까요? 만화 캐릭터를 현실의 캐릭터로 똑같이 CG로 만든다고 그것에 열광할지 잘 모르겠어요.
[서술자 희원이, 소설가 지망생]
"물론 만화 캐릭터가 현실의 아이돌 스타만큼이나 인기 있는 현상을 보면, 저만의 취향을 가지고 확신할 일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저는 실재하는 인간이 좋죠. 교감할 수 있는 진짜 존재요."
로봇이 라이브 공연장에서 자기 음악을 연주한다면, 음, 관객으로서 열광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현실에서 약간 어색한 움직임이지만 노래는 잘하는 로봇, 연주를 잘하는 로봇이 있다고 할 때 굳이 라이브 공연을 봐야 할 이유를 못 느낀다고 해야 할까요? 그냥 음원으로만 들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작품과 달리 라이브에서는 생동하는 진짜 사람과의 연대감을 느끼고 싶거든요. 로봇에게 연대를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제 경우엔 그냥 작품 자체를 감상하는 것과, 누군가와 우정을 쌓고 싶은 것은 강조점이 다르다고 해야겠죠.
그래서 공연 예술, 실황 공연 예술인 라이브 공연이라든지 연극 뮤지컬 등에선 인간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로봇이 인간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전까지는요. AI가 발표한 곡에 대한 전문적인 해석을 하는 음악 권위자들이 공연 시장을 주도하지 않을까 싶고요.
“안드로이드에게 오빠라 부를 순 없잖아. 생산된 지 1년도 안 되었으면 돌도 안 지난 건데.”
초고가 미술 시장도 생각해 보았어요. 일반 미술품이라면 AI가 담당할 게 많을 듯해요. 그런데 초고가 미술 시장은 성격이 조금 다르잖아요. 단순히 위대한 명화를 거래한다기보다는 고가의 재테크 품목이죠. 천박한가요? (웃음)
그렇다면 문화재급의 명작이라고 해두죠.
“거액의 작품을 조용히 내 보관실에 고이 모셔둘 수 있죠. 오를 때까지요. 폭락요? 위작만 아니라면, 그럴 리 없죠.”
<살바토르 문디> 인용을 참 많이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20세기 중반에 약 8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다는군요. 그게 조금 오르긴 했어도 여전히 저가였죠.
갑자기 개작한 것도 아니고 복원한 것도 아닌데, 그냥 그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다고 재감정을 받음으로써 수천억 원대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요. 이쯤 되면 전문가들의 식견이라는 게 당혹스럽죠. 가격 차이가 커도 너무 컸으니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선생님의 제자 입장에서 상당히 마음 상하네요.”
“그만큼 브랜드 가치에 사람들이 얽매인다는 것 같아요. 거장의 그림이라는 것, 거장의 작품이라는 그 이름값 하나로, 전혀 개작이나 보수도 거치지 않은, 그냥 그 작품 그대로 엄청난 가격 차이를 보였던 것이죠.”
과연 정확한 가격 측정이 가능한 걸까요? 그냥 시장에서 살 사람이 있으면 그에 맞게 가격이 형성되는 것이니, 정확한 작품의 가치를 안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죠. 그래서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도 생겼을까요?
인간의 작품이 AI의 예술에 밀리는 시대에 인간의 작품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은 더 높은 프리미엄이 붙을 개연성이 있어요.
“귀 자른 모습을 AI가 그린다고 해서, 실제로 귀 자른 사람이 자기를 그린 그림과 같을 수 있겠소. 이상 고흐였소.”
AI 시대에 인간의 걸작이 특수를 누리는 것이죠. 똑같이 복제 가능한 AI 작품이 대량 생산되는 것보단 유일성을 지닌 인간의 걸작이 최고가로 선호될 수 있어요.
중저가의 일반 미술 시장에서는 AI의 효율적인 작품들이 더 필요할 수도 있을 텐데, 초고가 시장은 사정이 다를 것이라 보죠.
공연예술과 초고가 미술 시장을 보면, AI가 흉내 내려고 해도 쉽지 않아요. 본질적 차이 때문에 살아남을 특성이 보이죠. 공연예술에선 과정적이고 놀이적인 속성이 보이고, 고흐의 작품에선 삶에 속하고 체험적인 속성이 묻어있죠. 그래서 ‘놀자’와 ‘살자’라고 표현해 보았어요.
사람이니까 일만 하며 살 순 없잖아요. 공연예술을 보아도 알 수 있죠. 우리가 음원을 그냥 듣기만 하는 건 아니죠. 다양하게 감상하고 싶어하죠.
설령 다양하게 놀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인간의 입장에서 자기 삶을 살아야겠죠. 이 역시 인간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거나, 의미 없을 일이죠.
우선 AI끼리 논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보는 입장에서 무슨 의미 있을까요? AI가 로봇에 탑재된 채 자기들끼리 노는 게, 사람 입장에서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그럴 때는 판돈이 걸리고 팔각링에서 안드로이드끼리 살벌한 싸움을 해야 환호하지 않을까요? 그때는 놀이를 넘어서 게임, 냉정한 승부를 내는 스포츠쯤이 되어야 AI가 개입할 의미가 있겠죠.
“보는 게 재미 있나? 불굴의 의지를 지켜보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과학 기술 자랑하나?”
“설령 게임으로 승부를 내더라도 인간끼리 하는 편이 흥행에 유리할 때도 있어요. 바둑계에서도 그랬듯이요. 모조리 알파고와 알파고 업그레이드 버전이 압도해버리니, 오히려 흥행 요소가 적어졌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AI는 바둑판에서 은퇴하고, 다시 인간끼리 바둑을 겨루잖아요.”
이러한 승부의 의미가 약해질수록, 성적에 얽매이지 않을수록 놀이의 성격이 강해지죠.
이 지점에서 공연예술처럼 인간의 퍼포먼스에 의미가 부여되죠. 온전히 놀이가 되면, 구성원이 참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논다는 과정 그 자체, 결과에 압박받기보다는 노는 과정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니까요. 누가 대신해주면 무슨 의미 있겠어요? AI가 개입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지점이죠. 여기서 인간의 참여가 독자적인 의미를 발산해요.
공연예술 말고도 장르로 안착한 형식이 있을까요? 솔직히 과정과 놀이의 성격을 강조하여 안착된 예술 형식은 잘 떠오르지 않아요. 물론 재즈의 즉흥 연주 스타일을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 역시 음반에 기록되는 순간, 과정의 의미 자체는 퇴색하니까요. 공연예술에서 즉흥 연주 스타일이 돋보일 순 있을 거예요.
전문 장르 형식으로 정착하지 않은 사례는 있어요. 우선 2차 창작 놀이라고 해야 할까요. 팬덤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팬아트라든지 팬픽이라든지 기존의 팬덤 대상물을 변용하여 창작하는 방식이죠. 그것을 통해서 서로 팬 커뮤니티에서 소통하는 거죠. 즐기는 거고요. 지금은 저작권의 문제로 유통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활발한 면이 있고요
[다큐 연출부원, 다중우주론 마니아]
“어쩌면 시민 예술가 집단에선 패러디하듯 기존의 인기 있는 AI 예술을 다양하게 뒤틀어서 저작권 제국주의라는 폭압에 저항하면서도, 위트 있게 2차 창작이란 게릴라 예술 활동을 할 수도 있겠죠.”
“독서 감상문이나 영화 감상문 등 감상문 형식은 어떨까요? 숙제로 많이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일기 형식으로 많이 기록하죠. 더 단단하게 발전하면 비평문이라고도 하겠죠? 대상을 끊임없이 달리 보면서 기존 비평 대상을 곱씹어보고 의미를 풍성하게 생산하고 공유하는 행위겠죠. 비평을 토대로 한 에세이를 쓰거나 새로운 놀이적 접근을 할 수는 없을까요? 당장에 떠오르진 않지만요.”
“여기서도 뛰어난 비평적 자질을 지닌 이들이 AI예술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비평을 무기로 삼을 수 있겠어요. 정교한 감상 행위는 곧 깊이 읽는 행위이니, 대상이 AI예술이라면 그때에는 시민에게 정치적 행위로 의미부여 할 시대니까요.
인문학적 글쓰기 관련 출판물, 다큐멘터리 작업은 정치적 이유로 편향된 작업물만 나올 수 있으니 인간을 대변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독후감의 2차 창작적이고 과정적인 속성이 비평을 건너서 우리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 점점 그 내용은 삶의 속성으로 전환되죠. 비평 대상에서 자유로워질수록요.
과정적 놀이적 속성 말고도 삶의 속성이자 체험적 속성도 인간이 해야만 의미가 생긴다고 했죠? 초고가 미술 시장의 사례처럼, 인간의 삶 자체가 녹아드는 것에서 의미와 가치가 생기는 거죠.
흔히 우리가 잘 아는 장르로는 에세이가 우선 생각나요. 일기 같은 형식이요. 정말 삶이 묻어나잖아요. 소설처럼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경험적 에세이인 수필을 쓸 때면, 작자가 아니라면 무의미해지는 지점도 생기죠. 그걸 어떻게 저작권으로 미리 걸어버릴 수 있겠어요? 그게 이상한 거죠. 그건 그냥 누구나 삶을 산다면 있는 것이고, 자신의 경험은 고유하니까요. 자신의 투병 과정을 다룬다고 표절이라고 할 수 없듯이요.
또 어떤 사람의 일생을 AI가 아무리 잘 쓴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소설로 빗대어 쓴다고 해도, 진실한 삶의 이야기보다 더 큰 아우라를 얻기는 어렵죠. 어떤 이야기는 실화이기 때문에 의미 있거든요.
남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나 르포 형식으로 AI가 100% 작업할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실화가 AI의 창작물로 인정받긴 어렵죠. 그게 바로 실화의 힘이자, 인간을 배제하고 AI만이 있어도 되는 영역일 수 없는 거죠. AI가 남의 이야기를 토대로 창작한다면 소설이나 시나리오일 순 있어도 에세이나 르포일 순 없잖아요.
경험을 강조한 예술 형식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편한 면이 있어요. 기존 예술 전통에도 부합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친숙하게 따라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때에는 소설보다 르포와 에세이의 방법론을 더 높이 평가하려는 시도가 있진 않을까요?
“경험을 강조하는 예술적 방법론에 비해 과정적이고 놀이적인 방법론을 계발하는 것은 좀 낯설기에 노력을 요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