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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Mar 27. 2024

‘~할 수 있다’에는 주어가 어디에 있나요

관형절인가 서술절인가 & 주어성 의존명사

나는 영어를 잘할 수 있다.     


아마도 처음에 이 문장을 보았을 때는 자신 있게 주어가 ‘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갑자기, 문득, 신호 없이 나른한 오후의 잔잔한 물결처럼 밀려와서는 점점 ‘동공지진’을 일으키던 깨달음이 있던 날이 있었다. ‘아, 아, 이토록 자잘한 깨다르마(깨달음아)!’ 큰 다르마란 이런 것은 아니겠으나, 내게는 이미 깨알같이 아기자기하고 나름대로 커다란 다르마였다. 문법 공부를 했다고 철썩 같이 믿었건만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 시절부터 밀려온 카르마 파도가 이제야 당도하여 내 뒤통수를 철썩 때리고 지나갔다.      


의존명사를 너무 얕본 것이다. 주어성 의존명사. 주격 조사 ‘~가’가 주로 붙는 의존명사로 대표적으로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영어를 잘할 수가 있다’인 셈이다. ‘I can do it’의 조동사 can의 의미쯤으로 보이던 의존명사가 그래도 자기가 명사라고 존재감을 드러내며 내 머리를 불편하게 콕콕 쑤셔댔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저명한 명사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일찍이 독립하여 자수성가한 자립명사도 아닌 것이, 의존적으로 다가와서는 내 뇌에 쩍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나쁜 녀석.’     


그렇게 ‘나는 영어를 잘할 수 있다’의 주어를 ‘수’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하고 갈등할 때도 있었다. 문법적으로 언뜻 보니 ‘나는 영어를 잘할’이 관형절이요, ‘수(가능성, 방법 등)’이 그것을 받는 것처럼 보였으니 더 생각할 것도 없어 보였다. 다만 언어의 효능 관점이랄까. 영어의 조동사쯤 되는 의미를 부여하는 ‘수’. 그리고 어디든 수시로 출몰하는 ‘수’. 그게 문장의 주어가 된다는 게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it ~ that절(to 부정사)’이 떠올랐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긴 주어절인 that절을 뒤로 돌리고, 가주어로 it을 써서 문장을 뒤로 ‘털어서’ 안정감을 주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영어를 잘할) 수가 있다.’이니 영어와 순서가 다르게 흐르는 경향이 있는 한국어에서는 앞으로 관형절을 잡아주고 헷갈리는 주어를 뒤로 잡아주어 서술어와 가깝게 위치시킨 것으로 봐야 할까 싶었다. 물론 만족스럽지 않았다. 애초에 한국어에서는 주어와 서술어가 멀리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처럼. 이는 분명 ‘I love you’와 다르다. 영어에서는 주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분명히 선언하고 대상을 밝히는 편이지만, 한국어에서는 주어와 목적어 등등을 다 말하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주어가 뭐 했대?’라고 물으면 그제야 ‘아, 그러니까 주어가 이러저러한 날씨에 그녀가 기분도 안 좋고 한데 눈치 없이 고백했다가 차였대.’라고 한다. 그제야 주어가 고백했고 차였다는 주어만의 완결된 사건이 발언된다. 이래저래 다 챙기고 나서야 주어의 행위와 결말을 아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확실하게 주어의 개인 영역을 행위까지 발언하고 대상을 짚는 경향의 영어 순서와는 다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수’는 그저 그런 배려심이 작동한 문법 구조라고 ‘선해’하기보다는, 그냥 문장의 의미 면에서 조동사쯤의 위치에 있음에도 의존명사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문장의 주어로 군림하는 격이었다. 수많은 문장에서 가주어도 아니면서, 독해의 위치에서 편의성을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원래 주어가 ‘나’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수’로 정정하게 하는 패악까지 부리는 듯했다. 

물론 ‘수’에는 방법, 가능성, ‘경우의 수’를 함의하는 세 유형으로 나누기도 하고, ‘경우의 수’를 뜻하는 사례는 가능성이란 개념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 엇비슷하지만, 확실히 방법으로 대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는 자립명사의 주어 역할이라 해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뾰족한 수가 없다’라고 하면 ‘수’는 비교적 선명하게 방법을 뜻하며 주어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어떨까? 이 경우에는 ‘가능성’의 의미가 짙다고 한다. 그렇다고 ‘나는 영어를 잘할 방법이 있다’가 아니라고는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때 자립명사와 의존명사의 의미가 모호하게 겹칠 텐데, 대개 이때는 의존명사의 성향을 합의한다. 그러면서 관련 논문에서는 이것이 주어인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보다는 어떤 용언과 연결되어 어떤 의미를 발산하는지만 언급한다. 결국 주어성 의존명사의 주어 역할 여부에 대해서는 이중주격, 이중주어, 쉽게 말해서 서술절 개념으로 설명한 것에서 찾기는 했다.      


이것이 통설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이러한 분석으로 보면 ‘나는 / (내가 영어를 잘할) 수 있다’인 셈이다. 이러면 심정적으로 이 문장의 주어일 것 같은 ‘나’가 안은문장의 주어가 된다. 그리고 안긴문장인 서술절의 주어가 ‘수’인 셈이다. 여기서 ‘나는 ~ 있다’라고 할 때 주술 호응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문장의 취지를 고려할 때 ‘있다’와 같이 존재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므로 주술 호응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서 ‘있다’는 ‘수’라는 서술절 주어에 호응한다. 그리고 ‘나’의 서술어 역할을 ‘~수가 있다’인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느 것이 정확한 분석인지는 잘 모르겠다.     


- 나는 영어를 잘할 것이다.

- 그런 가능성이(수가) 있다.

이 두 문장을 합하여 ‘나는 영어를 잘할 수 있다’라면 관형절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더구나 ‘그도 아플 / 리가 없다’ ‘그는 수상한 / 데가 있다’ 등등을 보면 관형절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서술절의 해석 방법을 적용하여 ‘그는 / [(그가 아플) 리가 없다]’ ‘그는 / [(그가 수상한) 데가 있다]’로 할 수도 있다. 서술절로 해석하면 안은문장의 주어가 문장 의미적으로도 주어가 되기에 마음이 편해진다. 다만 뭔가 서술절로 하면 약간 억지스러운 설명이라는 느낌도 든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관형절의 방식으로 해석하면 의존명사가 주어의 권좌를 독차지하는 것이고, 문법의 효용을 볼 때 어떤 문장에도 ‘수’가 들어가면 그게 주어가 된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래서 실용적 관점(못맞춤법 놀이의 관점)에서는 ‘형식적(문법적) 주어’와 ‘의미적 주어’로 명명하고, 형식적으로는 ‘수’가 주어 역할을 하지만, 의미적으로 실제 주어 역할은 ‘나’가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아쉽게도 현행 문법 체계에선 이렇게 분석할 수는 없다. 굳이 현행 문법 체계에서 인용하자면 ‘화제어(주제어)’로 ‘그’를 해석해볼 여지는 있다. 그렇게 치면 ‘영어’가 화제어일 수도 있으므로 좀 모호한 면이 있다. (영어는 그가 잘할 수 있다.)  

   

이왕 진행했으므로 못맞춤법 놀이의 관점으로 더 적용해 보자면, 개인적으로는 ‘잘할수있다’에서 ‘수’를 선어말어미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즉 그냥 관용적으로 쓰이는 허용 표현이라고 인정하고는, '잘한다'에 can이 스민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잘하다’는 기본형에 ‘수’라는 선어말어미가 추가되어 기본형의 의미가 확장된 형태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나는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못맞춤법의 관점으로는 ‘나’를 주어로, ‘잘할수있다’를 서술어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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