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은주

그림 소설

by 희원이

[목차: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

♬ 회사원 은주

♬ 퇴사

♬ 결혼

♬ 은희의 기억

♬ 이주와 이혼

♬ 은희와 여경

♬ 여경의 마지막 소설

♬ 예상치 못한 사건

♬ 동거

♬ 에필로그


[소개말]
-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는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그림 소설입니다.
- 또한 ‘가상 다큐 인터뷰 미편집본’의 형식, 또는 ‘다큐 인터뷰 문체를 적용한 에세이 소설’ 형식을 취했습니다. 감독에게 각 인터뷰 대상자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오래 전 은주는 회사원이었다. (지금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는 하지만,) 그때부터 은주는 본능적으로 여직원이 차별받는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그걸 어색하게 여겼지만, 따지고 들 만큼 강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타협하면서 회사 생활을 했고 나름 현명한 처신을 했다. 한편 동생 은희는 이러한 은주에 대해서 자기 견해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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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1938.PNG '김윤아 인스타그램'에서 세로글 인용


파- 르르 떨었다. 새

랑- 귀지의 끝에 걸린 익숙지 않은 발음을 딛고

새- 발음이 돋아났다.


투- 박했다.

명- 징했다. 날선 채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인지 발음인지

하- 등 중요하지 않지만,

고- 립된 열정이 엇나가버린 바람에 툭 깨져버린, 나


날- 들이

카- 위에 잘려나가고 말았다.

롭- (높)은 곳을 향하는 목소리는

고- 된 그리움으로


반- 발하고,

짝- 사랑의 허허로움은

거- 리의 바닥을 훔치는 가로등 불빛 같은

리- 야기처럼

고- 매한 슬픔으로 위장하여 땅으로 스며든다.


이- 생의 내용이란 대개 그렇다.

상- 한 마음으로 죽을 듯하다 어느 날 문득

한- 가한 때에 이르러서야 그리워지는.




IMG_1939.PNG → 서술자 은주, 71년생


♬ 회사원 은주


회사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남들이 알아주는 대기업이라 우리 회사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재무회계 분야의 직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숫자를 다루면 마음이 편해졌죠. 무엇보다 명료했거든요. 제게 숫자란 그랬어요.

우리 회사가 그 분야에서 인지도가 있었죠. 연봉이나 사내 복지 수준도 그 정도면 저로선 괜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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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급여를 더 받을 수 있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겠죠. 준다는데 왜 안 받아요? 그만큼 일을 더 많이 시킬 것은 당연하죠. 사실 덜 준다고 일을 덜 시키는 것도 아니잖아요? 감독님도 아실 거 아녜요.

돈 준만큼만 딱 일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걸요. 항상 월급 준 것에 120%쯤은 업무를 해주어야 회사로서도 손해가 아니라 여기는 걸까요? 보통은 과중하게 일을 받다 보니, 나름대로 부가되는 일을 걸러내는 자기만의 방법이랄까 그런 게 생기잖아요.


“저녁이 있는 삶이어야지. 요령껏 해야지. 안 그러면 혼자만 죽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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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시간 좀 있나?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런데, (한숨) 자네가 좀…”


주는 대로 다 받아서 일하다가는 정작 해야 할 원래 업무도 못하고 잡무에 질질 끌려 다니고 마니까요. 심지어 남의 일까지 떠맡아 하는 친구들을 보면 답답하기도 한데, 어찌 보면 제가 그런 유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가끔 제가 그 사람들에게 그저 만만한 동료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슬플 때도 있었어요. 그냥 모질게 거절하지 못해서 그런 것뿐인데, 누군가는 그걸 이용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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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회사에서 잘해보려고 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여자에겐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죠. 동료 여직원들은 필사적이었어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저는 조금 느슨한 게 아닐까 싶었죠. 그렇다고 제가 일을 안 한 건 절대로 아니에요. 동료 남자 사원들과 비교하면 훨씬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곧 시집가야 할 사람 같았어요. 그건 저뿐 아니라 다른 여자 동기들과도 비슷하게 느끼는 점이었죠. “꽃”이라고 하면 칭찬인 줄 알면서도 어쩐지 씁쓸해지더군요. 그런 말 뒤에는 꼭 “시집 갈 때가 되었네”라는 말이 따라붙었어요. 지금에야 그런 말이 많이 사라졌다지만 그때는 센스 있는 상사의 농담처럼 받아들여졌어요.


그런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기회가 오면 잡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죠.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요.

할리우드 여배우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해야 할 줄은 미처 몰랐죠. 여성에 대한 부당한 처우는 나만의 일은 아니다 싶었죠. 당시엔 더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진 않았죠.


늘 “김대리는 다 좋은데 말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해져 울화를 그 자식 머리에 토해버리고 싶었지만, 사실 말이 쉽지 보통은 상상으로만 그치고 말죠. 싸우고 나면 너무도 손실이 크다는 걸 어렸을 적부터 배웠죠. 기가 세다느니, 독종이라느니. 따져서 얻는 것이 더 많은지 생각해보면 정신적 스트레스, 실질적 이득 모두 따져보면, 그냥 웃어버리는 게 좋더라고요. 그렇게 학습된 거죠. 저는.


그게 정상이란 소리가 아니에요. 저는 답답한 선택을 했다는 거고, 지금도 솔직히 스트레스 받기보다는 혼자 잊어버리고 외면하는 쪽을 택하죠. 사는 데 편하니까요.

늘어가는 살만큼이나 넉살만 늘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심지어 더 잘난 여자들도 그런 대우를 받는다니, 미안하지만 어쩐지 위안이 되는 거 있죠?


어떤 면에서는 심술궂게도 혼자만 당하는 게 아니라는 비겁한 위안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혼자만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게 아니니 도움을 청해도 들어줄 사람은 있을 거란 약간의 희망 같은 거죠. 처음에는 비겁했던 것 같은데, 어쩐지 그들과 서로 도울 수도 있을 것만 같았죠.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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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때는 그걸 잘 몰랐어요. 그저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지고, 실망하기를 반복했어요.

혹시 여자가 출근을 위해서 남자보다 최소 한 시간 전에 일어난다는 건 아시나요? 육아 때문이라면 잠도 설치기 마련이고요. 화장도 해야 하고. 집안에서 최소한의 일을 정리해두기도 하죠. 애묘인이나 애견인이라면 아이들 밥도 챙겨주어야겠죠.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더 자고 싶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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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도 어쩔 수 없죠.


그런 와중에도 요즘에 커리어우먼들은 필라테스에 영어회화 공부에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하니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군살이 없다는 건 요즘엔 일류 트레이너를 두고 연간 회원권을 끊어서 몸매를 관리하는 유복함의 증거라고도 하지만, 강인한 경쟁 의지의 결정체 같기도 하거든요.

당시에도 회사에선 일에 지치고 남자 동료들의 텃세를 이겨내느라 힘들고, 또 그들이 원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 그들보다 더 지독해져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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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걸 또 비웃겠지만, 그 적은 기회를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다이어트는 어느 순간부터 여성 사회인의 의무 조항처럼 되어버렸어요. 압박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방심할 수 없다 보니 다이어트는 늘 저 자신을 괴롭히죠. 너무 지쳐 뭐라도 먹기를 버릇처럼 하다 보면 어느덧 군살이 늘거든요. 그건 단순히 예뻐지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기보단, 남자들의 세계에서 버텨내려는 몸부림이겠죠.


늘 실패하지만, 그럴수록 군살 없이 단련된 몸을 지닌 여자 동료를 볼 때 눈길이 가곤 했죠. 남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미감이라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고자 하는 경이로운 의지’라고 불렀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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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 75년생]
“은주 언니요? 언니는 착하고요, 똑똑해요. 책임감도 강하고,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어디서든 합리적이지만, 되도록 남들과 부딪치려 하지 않죠. 비교적 무난한 사람이에요. 예민한 면도 많지 않은데, 자기 일에서는 깐깐한 면도 있고요. 일에 관해선 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정도? 제가 기억하는, 커리어우먼이었던 언니는 그래요.”

“맞아요. 언니가 그러던가요? 요즘엔 탈코르셋을 말하면서, 예뻐지려는 욕망 자체가 남자들의 시선에 재단된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봐왔던 것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어렵겠죠. 저처럼 그런 것에 민감해하는 편이 아니라면 모르지만요.”

“그래요, 언니는 살에 민감했어요. 삶 말고 살이요. 하기야 살이 삶일 수도 있죠. 사회생활을 하려고 전투적으로 식단을 관리하니까요.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하지만, 또 그게 꼭 그렇지는 않잖아요. 건강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는 건 현대인에게 필수지만, 또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찌 보면 사회적인 삶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잖아요. 아닌가요?”

“요즘 같은 세상에 손가락 모양으로 메갈이니 어떠니 하며 사상 검증까지 하면서, 페미니즘이 위험한 사상처럼 호도하는데 아무래도 남자들이 많은 직장에선 더욱 더 조심해야 할 거예요. 더군다나 언니는 페미니즘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괜히 연루되고 싶지 않았을 수 있어요. 당장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굳이 나서서 관심 있다고 티를 낼 필요도 없겠죠.”

“물론 성차별이 불합리하다는 것쯤은 여자라면 누구나 느끼지만, 그 문제를 제기하면서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겠죠. 언니는 타협할 줄도 알았다는 거죠.
네, 어쨌든 남자든 여자든, 특히 여자라면 아무래도 외모 면에서 나은 것이 경쟁력인 것처럼 호도되는 세상이기도 하니까요. 비주얼 시대에, 그 비주얼이 큰 부를 창출할 수도 있는 시대에 그것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강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저도 압도적인 미인을 보면 한편으로는 질투도 나고, 한편으론 경탄하기도 하거든요. 그건 본능이 아닐까 싶을 만큼요. 미인의 기준이 과거에는 달랐다고는 하지만, 그냥 앞에서 연예인 K씨를 봤는데, 숨이 멎을 것 같으면서 원래 저런 모습이면 태곳적부터 미인으로 찬사를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쉽게 합의하고 말거든요. 직접 대면한 경험은 그만큼 강력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런데, 매일 답답한 아저씨들의 생각과 직면하는 언니는 그 안에서 사는 법을 익혀야 했겠죠. 평소의 언니를 생각할 때 그런 것에 불만을 터뜨리고 나면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잘 못자지 않았을까 싶어요. 언니는 언니의 방식대로 동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버텨내는 방법을 찾은 거겠죠.”

“언니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면서, 늘 실패하고, 그러면서도 집착하듯 다시 시도했죠. 매일 담배 끊는 것에 실패하는 사람처럼요. 언니는 그래도 다이어트를 자기만의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어요.
언니는 오프라 윈프리의 당당함을 좋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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