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소설
[목차: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
♬ 회사원 은주
♬ 퇴사
♬ 결혼
♬ 은희의 기억
♬ 이주와 이혼
♬ 은희와 여경
♬ 여경의 마지막 소설
♬ 예상치 못한 사건
♬ 동거
♬ 에필로그
[소개말]
-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는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그림 소설입니다.
- 또한 ‘가상 다큐 인터뷰 미편집본’의 형식, 또는 ‘다큐 인터뷰 문체를 적용한 에세이 소설’ 형식을 취했습니다. 감독에게 각 인터뷰 대상자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한동안 회사에서 인정 받고 좋았다. 시샘 어린 시선도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은 듯했지만, 더 알지 않아도 될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곧 선택의 기로에서 흔들렸다. 은주는 한직으로 밀려난다. 그뿐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회사에 헛소문이 돌았었고, 그 때문에 은주는 불이익을 받는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지만, 회사는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만 한다. 존경하던 상사는 회사에서 밀려나고 은주 자신도 그런 회사에 더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 퇴사
[서술자 은주, 71년생]
“이거 이름도 나가나요?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요. 이제 와서 그런 걸 말해서 좋을 것도 없고요. 이미 다 끝난 이야기인데, 법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잠깐의 침묵.)
아니오. 일단은 다 말할게요. 혹시 인터뷰 영상을 쓰실 생각 있으면 저와 꼭 상의해주세요.”
그러니까 주임에서 대리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어요. 솔직히 그때는 정말 일할 맛이 났어요. 하면 되는구나 싶었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본의 아니게 경쟁 구도에 있었던 남자 동료를 앞질러 승진한 거였죠. 성취감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항상 묘한 우월감을 보이던 동료를 이긴 거였거든요.
솔직히 객관적으로 제가 그 사람보다 잘 나진 않았죠. 그 남자 동료는 최고의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우월감에 젖어 있었는데, 그것에 반박하지 못할 만큼 일을 잘하긴 했어요. 그러면서 반항적인 면도 있었는데, 그렇게 해도 앞길이 보장된 것 같아 좀 배가 아팠죠. 얄밉기도 했고요.
반대로 전 친화력이 있는 편이었죠. 엄청 살갑게 굴진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호감을 준다는 평을 받았죠. 그건 제 생각이 아니라 동료들의 객관적인 평가였죠.
무엇보다 주임 업무로는 특별히 돋보이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조직 사회답게 성실하고 친화력 있다는 장점이 승진에 주효했다고 보았죠. 직무에 관해서는 제가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할 일도 아니고 꼼꼼하게 업무를 보면 되니까요.
어쨌든 누구든 제가 먼저 승진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건 사실이에요. 학벌 때문이기도 했고, 제가 여자라서 그렇기도 했을 거예요. 그게 옳지 않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지만, 제가 먼저 승진한 것에 대해 ‘뜻밖’이라는 반응을 숨기지 못했어요. 어떤 이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지만, 어떤 사원은 떨떠름해하는 것 같았어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새삼 놀라웠죠.
“그 소식 들었어요? 글쎄 이번에 누가 승진했는지 알아요?”
물론 제 기분일 뿐이죠. 기쁜 만큼 주변이 신경 쓰였죠. 그리고 뜻밖에 찾아온 희소식이 나쁜 소문의 빌미가 될 줄은 미처 몰랐죠.
맞아요, 그 소문.
제가 과장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요. 네, 불륜 말이에요. 처음에는 부장님이라고도 했는데, 과장님이 비리 문제에 연루되고 사실상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으면서 과장님으로 소문의 대상이 바뀌어 있었다고 해요. 그조차 나중에 알았죠.
소문이 있다는 걸 알기 전엔, 그저 승진 소식에 들떴었죠. 의욕적으로 일하려는 마음이 샘솟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부장님이 따로 밖으로 부르셨죠. 과장님과 함께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결국에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가더라고요. 이사님의 업무추진비를 맞춰 달라는 말을 돌려서 하셨죠. 사실 그런 말을 직접 대놓고 하진 않았어도, 그걸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었어요.
“오늘은 자네들이 좋아하는 걸로 먹자고.”
듣자마자 직감은 왔지만, 처음 있는 일이라 책정된 업무추진비 이외로 편법적으로 맞춰 자료를 만들라는 의미인지 확신이 안 들더군요. 말을 너무 애매하게 돌려서 정확하게 그런 표현이 나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과잉 해석했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은 없어요.
그런데 지금도 가끔은 생각해요. 왜 저였을까요? 제게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를 봤던 것일까요? 입이 무거워 보였을까요? 아니면 비리에 굴복할 만하게 보였던 것일까요? 혹시 때가 되면 경력 단절이 될 거라 보았기에 그랬을까요? 잘 모를 일이죠.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면, 과장님과 저는 부장님과 같은 대학교 동문이었다는 것뿐이죠. 일종의 줄일 수도 있겠죠. 저도 의식하지 못했던 줄이라면, 줄일 거예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처음에 동료들도 저의 학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었다고 해요. 솔직히 성별이란 남자들의 유대감을 이길 게 없는데 말이죠.
어쨌든 그 제안을 모호하게 받고는, 갈등했었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한 만큼 기회가 오는가 싶기도 했지만 찜찜했죠. 누구나 돈 관리를 하다 보면 그러한 유혹이나 압박이 있을 수 있죠. 상사를 잘 만나는 건 그래서 중요한데, 어떤 이에겐 분명한 기회일 수도 있겠죠.
다행히 저는 그런 유혹을 위험하게 여겼어요. 과장님께서도 제 마음을 눈치 채고 배려해주셨죠. 관련 업무에 대해서만큼은 과장님이 따로 관리하셨다고 알거든요. 그 뒤로 저는 부장님과 교감이 딱히 없었지만, 그만큼 핵심 업무에선 소외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차라리 그게 편하다고 여기기도 했는데, 결국 타부서로 발령이 나더라고요.
홍보팀에서 제 직무 경력을 살릴 수 없으니, 처음엔 모든 게 버거웠습니다. 솔직히 이해할 수 없는 인사이동이기도 했고, 홍보 담당자들 입장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죠. 마치 회계팀 파견 직원이 홍보팀 실제 예산 지출 현황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오해할 만하죠.
회계팀에 있던 사람을 굳이 홍보팀으로 보내면서 그 이유가 회계를 보는 사람도 현장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자원한 것도 아니고, 구매나 영업 쪽도 아닌 홍보라면 어쩐지 현장 감각을 키워야 한다는 명분도 군색했죠.
거기서 1년쯤 근무하면서 주로 기자들을 만나고 공공기관 직원과 유대를 쌓는 일을 했는데, 모든 게 부가적인 일 같았어요. 없어도 되는 직원이랄까. 홍보팀 업무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한 채 혼자서 겉도는 것 같았어요.
그즈음 우연히 제 소문을 알게 된 거죠. 과장님이 횡령한 사건이 대서특필되었는데, 친분 있던 기자들에게 응대해가며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기사 내용을 조율하려고 했었죠.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거에요. 좋지 않은 헛소문을요.
처음엔 퇴직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입금된 액수를 보고, 그 정도면 그런 회사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각서를 쓰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물론 그때는 과장님 비리 문제로 회사가 골치 아플 때 저마저 덧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 강했죠.
지금 돌이켜보면 돈에 진 느낌도 들지만, 돈보다는 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해도 이길 수 없을 거란 비관적인 마음에 진 것이죠.
그렇게 제의를 억지로 받아들이고는, 회사에서 발주를 넣던 하청업체에 연결되어 이직하는 형식으로 회사를 그만둔 거죠. 새로 옮긴 회사에서도 그리 오래 다니진 못했어요. 6개월쯤 다녔죠. 누군가 제 안 좋은 소문을 알 것만 같았어요. 제가 그걸 마치 인정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상황이 너무 치욕적이었고요.
그렇게 그만 두고 일주일이 지날 때쯤인가, 뭔가 허전해졌어요. 내게 남은 게 뭘까 싶었죠. 당장은 괜찮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돈은 떨어지기 마련이잖아요. 법정 공방을 했다면 더 나았을까 싶은 가정을 해보았죠. 쉽지 않았겠죠. 가끔 TV를 보다 보면 저런 모욕을 어떻게 견뎌낼까 싶은 사건들이 있거든요.
조금 무기력했죠. 한동안 일을 안 해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어요.
아, 과장님 말인데요.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과장님은 자신의 죄를 부인하며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처음에는 비리 사실을 인정했는지, 처음 진술이 맞는지 번복한 진술이 맞는지 저로선 알 길이 없었죠. 그저 그동안 과장님을 봐온 것으로만 보면, 회사 쪽이 의심이 가기는 했죠.
“난 회사에 충성한 죄밖에 없다고. 이런 식으로 끝장날지 몰랐어. 허무할 뿐이지.”
결국 법정에서 과장님을 위한 증언도 했고요. 제가 아는 사실만으로는 진실에 가닿기란 역부족이었지만요. 그 때문에 회사에 밉보였죠. 새로 옮긴 하청업체에도 오래 다니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고요.
“맞아요.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한통속인 회사엔 어차피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은희, 75년생]
“언니를 볼 때마다 제가 울화통이 터졌어요. 저라면 그렇게 가만 놓아두진 않았을 것 같거든요. 언니를 설득해보았지만, 실패했죠. 언니 마음도 이해해요. 그 당시엔 여자가 그런 소문에 시달리면 혼자 부당한 비난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지금처럼 SNS를 통해서 누군가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느낌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 시절이었으니까요.”
“한동안 이직한 회사를 의욕 없이 다니다가 그만두는 꼴을 보니, 너무 속이 상했죠. 사람을 믿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비싼 공부를 한 셈 치자고 했지만, 본인에게 그런 말이 와닿을 리 없죠. 언니 혼자 감당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어요.”
“어쩌면 언니는 그 돈을 받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건 언니의 선택이었고, 언니가 짊어지고 나가야 할 인생이니까요. 그저 옆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