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소설
[목차: 숙희였던 게이코와 에밀리 디킨슨]
♬ 할머니와 나
♬ 엄마에게
♬ 가보지 않은 길
♬ 아이도 내 마음 같지 않고
♬ 그래도 은생이었다
♬ 에필로그
[소개말]
- '숙희였던 게이코와 에밀리 디킨슨'은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그림 소설입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작중 서술자인 여성 희원이는 자신의 가족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 다큐 감독이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인터뷰 문체를 적용하고 있다. 감독은 주로 작중 서술자인 희원이에게 의존하지만, 할머니 등 다른 인물의 인터뷰도 담아낸다.
- 자식들이 대학교에 가고, 희원이는 자신의 꽃가게를 한다. 자신의 일을 폄훼하는 것 같은 남편이 못 마땅하지만, 그럭저럭 사이가 나쁘지는 않다. 딸보다 조금 어설픈 면이 보이는 아들이 눈에 밟히기도 하지만, 딸아이의 야무진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별 문제 없이 지내는 이 순간이 복이라 부를 만하다. 때로는 섭섭한 일도 생기겠지만. 그리고 이 모든 평범하고 소박한 여유의 밑바탕에는 누군가의 묵묵한 의지와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 그래도 은생이었다
중년이 되고,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조금 허탈하기도 했어요. 아들 녀석은 이제 막 제대해서 복학 준비 중이죠. 요즘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던데, 여자 친구를 얼마 전 사귀는 것 같더라고요. 여자 아이가 자기보다 잘난 것을 너무 싫어하면서도 정작 아들은 노력을 안 하죠. 게을러요.
엄마 생각과 제 생각은 다르죠.
지 아빠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여자친구를 질투하는 걸 보고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은 핀잔을 주었어요. 그랬더니 그때 뾰루퉁했는지 그 뒤로는 도통 여자친구 얘기는 안 하죠.
딸아이가 저를 닮아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죠. 로스쿨을 준비하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제 일은 제가 책임지려고 노력해볼게요.
민석 아빠는 꼭 딸내미가 자기 닮았다고 그러죠. 아들 녀석은 그게 못마땅한가 봐요. 그러면 아빠는 호탕하게 말해요.
“민석아, 네가 아무리 못나도 아빠 것은 다 네 거야. 영희는 유학 보내주고, 좋은 신랑감 찾아 시집 보내면 끝이지. 넌 장남이잖아.”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고, 요즘 세상에 딸이 무슨 남남이냐고 탓하기도 하지만, 딸아이가 없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긴답니다. 요즘 민석이가 기가 많이 죽은 것 같아서요. 하기야 뭘 해도 늘 누나와 비교가 되니까.
저는 아이들 기르느라, 경력이 단절되어서 그때부터 자그마한 꽃집을 운영했어요. 큰 수입은 못 올리더라도, 소소하게 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수 있을 정도는 되죠. 그러면 꼭 남편은 빈정 상하는 말을 툭 내뱉곤 하죠.
“그거 돈 얼마나 번다고, 나가서 사서 고생을 해.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좀 좋아. 다 당신 힘들까 봐 하는 말이지.”
요즘 여름 휴가라도 가면, 더운 날에 서로 붙어있기도 버겁죠. 나이가 들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리워져요. 오랜 만에 최근 인기 작가들의 책도 한두 권씩 사다가 쌓아두곤 하죠. 예전처럼 열심히 읽지는 못하지만, 어쩐지 안 읽는 책이라도 쌓아두고 마음이 든든해지거든요.
어제는 정말 오랜 만에 친구랑 젊었을 때 좋아했던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어요. 남편에게 허락받는 데도 어김없이 빈정 상했죠.
“그래도 이쯤이면 은생이었다. 금생은 아니어도 나쁘지 않았다.”
♬ 에필로그
청춘? 글쎄, 내게 청춘이라는 게 있었나? 그냥 젊은 시절은 있었겠지. 그러니까 이 나이가 되었겠지. 북에서 1.4후퇴 당시 밀려 내려올 때는 그냥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그땐 정말 급박하게 상황이 변했어. 어렸을 적 내게 모자 만드는 것부터 미싱 기술을 가르쳐준 마님은 아마 그때 돌아가셨을 거야. 우리 엄마가 그 집 하녀였는데, 엄마와 함께 일하시다가 엄마가 성실하니 나도 예뻐해준 거지. 많은 걸 베풀어주셨는데.
착한 분이었는데, 혼란한 때에는 그런 것도 소용 없었어. 인민재판 때 동네 친척에게 고발을 당해서는 광장에 끌려 나가서 몰매를 맞았었지. 그걸 우리 엄마가 막아주려다가 함께 어디론가 끌려가셨지. 그게 다야.
나는 어려서 화를 면했지만, 그 뒤부턴 편한 삶은 아니었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으니까.
그 사람, 자기 살겠다고 마님에게 칼을 꽂았던 거야. 자기에게 많은 걸 내어주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거지. 돈을 갚기가 싫었든가 내가 모를 원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몽둥이로 마님을 후려치며 당에 충성을 맹세할 때는 정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지. 심지어 친척이라 연좌제가 무서웠는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문도 공개적으로 했었어. 너무 무서웠어. 우리 엄마도 마님과 함께 있었으니까. 모든 게 그때 끝나는 줄 알았어.
지금까지 살아있을 줄은 몰랐어. 그 시절엔 당장 그날 살아남는 게 중요했으니 그저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야 했어. 그래, 이런 말을 오랫동안 한 적이 없었지. 죽을 때가 되니 주책이네그려. 죽어서도,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놈들은 안 만났으면 좋겠어. 그게 지금 내 소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