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아르바이트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던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주문을 받고 서빙을 담당하던 캐셔였다. 영어를 잘 못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일을 했지만, 캐셔 한 명이 어쩌다가 빠질 때면 일손을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파트타임인 캐셔들의 스케줄은 매번 변동되었고, 대타를 못 구하면 하교 후 과제를 뒤로한 채 레스토랑으로 다시 등교하곤 했다.
가게를 팔기 직전에는 휴일인 일요일에도 문을 열었고, 선택의 여지없이 매일 출근을 했다. 그 당시의 시급은 한국의 두배 가까이 되었고, 팁도 후한 편이어서 용돈 벌이로는 괜찮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성적인 내가 사람들과 소통하고 부대끼며 일 하는 게 재밌다고 느낄 만큼 보람도 있었다. 처음으로 나에게도 미미하게나마 외향적인 면도 있다는 걸 느꼈다.
귀국 후, 편입학을 했지만 사실 학업을 이어가고 싶은 것보단, 대학생 신분으로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하기 위해 다시 학생이 되었다. 공연 쪽 일에 뜻이 있던 나는, 전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던 연기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배우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연출을 하려면 연기를 우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강남에 있는 연기학원은 생각보다 수강료가 비쌌고,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알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단기 알바였다. 평일엔 학교와 연기학원을 다니고, 주말에 마트 진열 알바 혹은 신제품 홍보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진열 알바는 단순 정리 작업이라 페이가 작았고 홍보 알바는 시급이 꽤 괜찮았다. 나중에는 프라이팬을 너무 잘 팔아 본사에서 입사하라고 연락이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 있고 활달했던 모습이었을까.
단기 알바는 아무래도 지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좋은 페이를 주는 알바를 찾다가, 미국에서 학교를 나온 경험을 살려 초등학생 영어 과외 알바를 시작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수업의 기억보다 과외를 구하기 위해 아파트 꼭대기층에서 1층까지 전단지를 붙이면서 구했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는다. 경비 아저씨에게 혼나기도 했고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그때는 무조건 과외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에 너무나도 절실했었고 아마 그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여러 경험들을 해보니, 결국 안정적인 직업은 월급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때마침 운이 좋았던 걸까. 4학년 2학기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입사해보니 생각보다 너무 어린 나이에 회사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놀걸 그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