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와 함께 있는데 왜 외로워야 할까
에둘러 말하지만, 이는 결국 나의 비극적인 연애사를 되짚는 일이었다. 짐짓 연필을 깎아 보고, 쓰지도 않던 안경을 쓰고 책상에 앉아 보지만, 소용이 없다. 자꾸만 욕설이 역류했다. 그 애만 생각하면... 아무래도 답은 술인가.
미안하다는 서두는 그렇게도 어이가 없었다. 미안한 걸 알면 미안할 짓을 왜 하지. 그러면서 본인 할 말은 다 해내는 그의 입을 휴지로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이젠 널 좋아하지 않아. 그 텅빈 눈을 응시하고 있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아가, 손에 쥘 무언가를 찾으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딱딱한 걸 쥔 주먹으로 치면, 그 타격은 배가 된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아쉽게도 여기엔 풀밭과 벤치와 강뿐이다. 다시 주먹을 무릎 위에 살포시 놨다.
그치. 나도 지겨울 참이었는데, 잘됐다. 야. 예쁘게 비꼬기는 내 강점이자 공적이었다.
그 애는 무서운 영화라도 본 듯, 두려움에 떨며 나를 봤다. 이 정도도 각오 안 하고 미안한 짓을 벌인 건가. 처음으로 그의 배포를 알게 됐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더 해 봐, 그의 눈은 채근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더는 굴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바라봤다.
밤의 강변에서 진원된 소리는 강력하다. 그냥 내 팔꿈치가 강력했다. 팔꿈치가 닿자 그는 억, 소리를 내며 명치를 더듬었다. 그게 또 짜증나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 앞에 섰다. 신발을 벗어 손에 쥐었다. 뻑, 소리에 가까운 마찰음이 울린다. 꽤 굽이 있는 운동화는 사람 머리를 때리는 데에도 쓰일 수 있구나. 쓸모없는 깨달음만 얻었다. 나는 열이 뻗치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벤치 위 그의 휴대폰을 집어 강에 던졌다. 내 신발 한 짝도 같이 던졌다. 숨이 가빴다. 이젠 뒤에 누가 있는지도 확인하기 싫어서 그대로 전진했다. 그래도 된소리는 안 냈다고 본인을 칭찬하며 집으로 향했다. 한밤의 강변에선 비릿하고 외로운 냄새가 났다.
3년 동안 이 연애가 순탄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관계였다. 다른 말로는, 한 부분이 무너지면 몽땅 무너져 버리는 관계였다.
싸우는 날이면 유독 냉하고 고요했던 그 장소들이 기억난다. 너의 침대, 너의 차 안, 나의 차 안, 너의 작업실, 나의 작업실, 어떤 식당, 길거리 등등.
대개는 식상한 이유에서였고, 가끔은 큰 일로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싸우고 나면 나는 늘 담배를 태워댔다. 그래야 속에 있는 비속어가 입 밖으로 안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애는 담배를 싫어했다. 그래서 오기라도 부리듯, 옆에 딱 붙어 있다가, 담배 불씨가 꺼지면 각자 알아서 집에 갔다. 그 짓을 3년이나 해댔다. 나는 그동안 네 작업실의 일렉 기타를 두 번이나 깨먹었고, 내 작업실의 책들을 다섯 번이나 무자비하게 던져댔다. 길에서는 그 애의 멱살이라도 잡았던 것 같다.
손버릇이 안 좋네. 최악이다. 그럼에도 그 애는 냉하게 나를 볼 뿐이었다. 가끔은 언성을 높여 나를 불렀던 것 같다.
그 균열로 탄생한 그의 노래, 나의 문장은 돈을 벌어다 주었다. 사랑의 값 같은 거였다.
우리는 연락 한 번 없이 서로의 일에만 매진했다. 그러다가 한 쪽이 작업을 끝내고 화해의 손을 내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로의 결핍을 채웠다. 그리고 벌어 온 사랑의 값으로 서로를 배불려 줬다.
그럼에도 나는 배가 고팠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배고픈 사람 같았다.
나는 네가 진짜 싫어, 윤찬아.
어느 날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나도 그래. 내가 싫어.
별 말 없이 캔맥주를 들이켰다. 사랑에서 오는 고독은 씁쓸했다. 역류할까 봐 삼키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냥 삼켜내고 맥주 캔을 찌그러뜨려 던져 버렸다. 이를 악물고 잠자리에 들었다. 테라스에서의 척척한 공기가 몸에 들러붙은 것 같았다. 그럼 윤찬도 이걸 머금고 있는 건가.
미닫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은 공간적 헤어짐을 맞았다.
분명 죽을 것처럼 지쳤고, 눈도 감았는데 잠에 들진 못했다. 그렇다고 뒤척이지도 않았다. 징그러운 고독과 그 고통에 짓눌려 있을 뿐이었다.
테라스도 샤워를 하나. 연신 물을 흩뿌리는 소리가 났다. 계속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곧 윤찬이 들어왔다. 나보다 몇 배는 척척할 그 몸으로 허덕이며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었다.
미안, 미안, 진짜 미안, 미안해. 왜 그가 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을 참배드리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군 채 누구한테 향하는 건지도 모를 사과를 해댔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흐느끼는 소리와 빗소리가 구분되지 않았다. 주안은 이따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장마의 밤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주안은 잡념으로 시간을 까먹고 있다. 그때 윤찬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편했을까. 내가 지금 이딴 생각을 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늘 그렇듯 주제는 윤찬이다.
주안은 윤찬을 사랑했다. 아니야. 주안은 윤찬을 혐오했다. 아니야. 주안은...
그녀는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적확한 표현이 없음에 슬퍼했다.
폭염과 장마가 만난 날이었다. 폭염이었던 윤찬은 장마였던 주안에게 우산을 씌어줬다.
"감사한데, 필요없어요."
"네."
주안은 그저 걸었다. 집이 나올 때까지. 윤찬도 걸었다. 주안에게 우산을 씌어준 채.
둘은 처음 대화를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안은 짜증이나 귀찮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윤찬은 정말 우산을 씌어주기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걸었다. 눈에 띄진 않지만, 확실히 기이한 광경이었다.
미안해요. 분명 윤찬의 우산을 뺏어 계단을 오르는 건 주안이었지만, 사과는 윤찬이 했다.
주안은 2층 계단 중간쯤에서 멈췄다. 그러더니, 다시 층계를 내려왔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우산을 내팽개치고 현관문 앞에 선 윤찬을 끌어안았다.
훗날 이 만남에 대해 둘에게 물으면, 각자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삶이 지겨워서, 주안이 말했고, 기억이 안 난다, 윤찬이 말했다.
과욕이었던 것 같다. 원래 장마와 폭염은 만날 수 없는데, 둘의 만남을 합리화하려 들었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잠식시킬 수도, 소강 상태로 만들 수도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고독해지는 짓이기도 하다. 둘은 서로가 마모돼 가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사랑받는 사람인 척, 사랑을 베푸는 사람인 척 연기를 해댔다.
다시 나 좀 사랑해주면 안 돼? 윤찬이 울부짖던 밤이었다. 제발 나 좀 다시, 다시 한 번만... 딱 한 번만...제발 주안아, 응? 사랑해줘 제발... 새벽 세 시에 내 자취방 현관문 앞에서 내 바짓단을 잡고 애원하는 그가 불쌍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동정한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나고 보니 그 마음 또한 흐릿해졌다. 그 마음을 품던 나마저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불쌍하기만 했다. 더이상은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래에서 그의 흐느낌과 문뱃내가 뒤섞이는 게 느껴졌으나, 주안은 피곤했다. 그냥 너무 피곤했다. 사는 게 피곤했다. 죽고 싶을 만큼 피곤했다.
잘래. 주안이 정면만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윤찬은 더 격하게 흐느꼈다. 사채업자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는 채무자같이, 간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그가 불쌍하고 피곤했다. 주안은 모든 게 피곤했으므로 윤찬을 본인 인생에서 방치했다. 윤찬아. 바짓단에서 손이 흘러내렸다.